디자인 세상에도 빙봉이가 있을까
어떤 디자인은 끝까지 설명해도 이해되지 않는다. 수많은 문장과 근거를 준비해도, 화면 앞에서 누군가는 고개를 갸웃하고, 또 누군가는 잠시 침묵하다가 “이건 좀 다르게 해보면 안 될까요?”라고 말한다. 그 말이 끝나면 공기가 달라진다. 디자인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지만, 이미 누군가의 마음속에서는 조금씩 지워지기 시작한다. 그렇게 이해받지 못한 디자인은 서서히 자리를 잃는다. 파일 속 깊은 폴더로 옮겨지고, 버전 히스토리에서 뒤로 밀리며, 결국 더 이상 불리지 않는 이름이 된다.
나는 그런 디자인들을 여러 번 봐왔다. 한때는 꽤나 애정을 쏟았던 화면들이었다. 수십 번의 수정 끝에 균형을 맞췄고, 글자 간격 하나까지 세심히 다듬었던 것들이다. 그런데 회의 한 번이면 모든 게 뒤집혔다. 이유는 단순했다. “이해하기 어렵다”는 말 한마디였다. 그 말은 언제나 무겁다. 그것이 곧 틀렸다는 뜻은 아니지만, 설득이 실패했다는 뜻은 된다. 그리고 실무에서의 실패는 언제나 논리보다 감정의 무게로 다가온다.
이해받지 못한 디자인은 종종 ‘과한 시도’로 분류된다. “좋은데, 우리 서비스에는 안 어울려요.” “의도는 알겠는데, 사용자 입장에서는 낯설 것 같아요.” “이건 다음 버전에서 다시 논의하죠.” 이런 말들은 모두 부드럽지만 사실상 거절의 다른 표현이다. 다만 그 거절은 늘 완곡해서, 때로는 희망처럼 들리기도 한다. 그래서 디자이너는 종종 그 말을 믿는다. ‘다음 버전’을 기다리며 디자인을 남겨둔다. 그러나 대부분의 ‘다음 버전’은 오지 않는다. 그 디자인은 다시 불리지 않고, 그대로 남는다.
시간이 지나면 그런 디자인들은 일종의 ‘유령 컴포넌트’가 된다. 피그마 파일 안 어딘가에서 발견되지만, 아무도 손대지 않고, 누구의 소유인지도 불분명한 상태로 남아 있는 것들. 그중에는 꽤 괜찮았던 아이디어도 있다. 다만 당시의 컨텍스트가 사라졌을 뿐이다. 한 시점에는 분명 논리적이었고, 팀의 목표와도 맞았던 시도였지만, 그때의 논의가 잊히면 맥락도 함께 증발한다. 디자인은 이유 없이 죽지 않는다. 다만 맥락 없이 잊힐 뿐이다.
그래서 요즘은 ‘좋은 디자인’을 말하기보다 ‘살아남는 디자인’을 더 자주 생각한다. 살아남는 디자인이란, 누군가가 그것을 기억해주고, 다시 꺼내서 이야기할 수 있는 디자인이다. 조금은 덜 세련돼도, 팀이 이해할 수 있는 문장으로 번역된 디자인. 다른 사람의 입으로 다시 설명될 수 있는 디자인. 결국 디자인의 생명력은 형태보다 언어에서 시작된다.
가끔은 이해받지 못한 디자인이 틀린 것이 아니라, 설명의 순서가 틀렸던 건 아닐까 생각한다. 우리의 말이 먼저 어려웠던 건 아닐까, 혹은 우리가 너무 앞서가서 아직 아무도 그 지점에 닿지 못했던 건 아닐까. 디자인은 결국 ‘지금의 언어’로 번역되는 순간에야 받아들여진다. 아무리 뛰어난 아이디어라도 그 언어를 잃으면, 팀의 문맥 속에서 살아남지 못한다. 그래서 디자이너는 늘 두 가지 언어를 써야 한다. 하나는 디자인의 언어, 또 하나는 팀의 언어다. 전자는 논리와 형태로, 후자는 감정과 맥락으로 구성된다.
나 역시 한때는 설득이 실패할 때마다 억울했다. ‘이게 왜 이해가 안 되지?’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조금 다르다. 이해받지 못했다는 건, 단지 내가 옳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라, 내가 아직 전달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그 둘은 다르다. 누군가에게는 설명이 충분하지 않았을 뿐, 그 디자인이 틀렸던 건 아닐 수도 있다. 문제는, 실무의 속도는 언제나 그 ‘충분한 설명’을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이해받지 못한 디자인은 사라진다. 시간이 모자라서, 문장이 부족해서, 혹은 팀의 감정이 그 시도를 감당하지 못해서.
하지만 나는 여전히 그 디자인들을 떠올린다. 퇴근길 지하철에서 문득 생각나기도 했고, 다른 프로젝트를 하다 비슷한 문제를 만나면 예전의 그 구조가 다시 떠오르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조금은 안도한다. 아무도 이해하지 못했던 디자인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라는 걸, 적어도 나만은 기억하고 있다는 걸.
디자인의 실패란 사실 ‘삭제’가 아니라 ‘보류’에 더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언젠가 다른 형태로, 다른 문장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는 가능성 말이다.
결국 모든 디자인은 이해받기 위해 만들어지지만, 그 과정에서 반드시 오해를 거친다. 오해가 없으면 진짜 이해도 없다. 팀이 같은 그림을 보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하고, 그 시간 동안 우리는 여러 번 미끄러진다. 이해받지 못한 디자인들은 그 미끄러짐의 흔적이다. 그래서 나는 그것들을 지우지 않는다. 완성된 화면만큼이나, 설명에 실패한 화면들도 중요하다. 그건 ‘이해받기 위한 연습의 기록’이니까.
어쩌면 디자인의 가장 큰 가치는 완성된 결과가 아니라, 그 결과를 얻기까지 이해받지 못한 시도들의 총합에 있는지도 모른다. 그 실패들이 쌓여야 비로소 한 문장이 만들어지고, 그 문장이 다음 디자인을 낳는다. 그러니까 이해받지 못한 디자인이 가는 곳은, 어디 먼 곳이 아니라, 결국 다음 디자인 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