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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답보다 확률을 선택하는 마음

불확실함 속에서 일하는 사람의 사고 방식

by 김태길

디지털 제품을 만드는 일을 여러 해 동안 하다 보면 어느 순간부터 스스로 이런 질문을 멈추게 되는 시점이 찾아온다. 지금 이 선택이 과연 정답이 맞는가, 혹은 이 화면이 정말로 최선인가 같은 의문들인데, 이 질문들을 멈춘다는 건 답을 찾았다는 뜻이 아니라, 그런 질문이 더 이상 올바른 방향의 질문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다는 의미에 가깝다. 디지털 환경에서 ‘정답’이라고 부를 만한 것은 대부분 일정 시점에서는 잠정적인 결론에 불과하고, 다음 분기나 다음 이슈, 다음 요구 사항이 들어오는 순간 다시 흔들리거나 새롭게 정의되기 때문이다. 정답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서는 정답을 찾기보다 정답이 아닐 가능성까지 포함해 판단해야 하고, 그래서 디자인 실무에서는 자연스럽게 확률이라는 사고방식이 중심이 된다.


확률을 선택하는 방식은 단순히 ‘잘 될 가능성이 높다’ 같은 낙관적인 태도와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냉정하고 건조한 태도에 가깝다. 어떤 화면이 사용자에게 받아들여질 확률, 어떤 문장이 오해 없이 읽힐 확률, 어떤 행동이 예측한 대로 이어질 확률, 어떤 기능이 기술적 제약을 견디며 작동할 확률 같은 요소들을 하나하나 검토하는 과정이다. 이 과정은 정답을 찾으려 할 때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때로는 훨씬 더 오래 걸린다. 하지만 현실의 제품은 정답이 아니라 확률 위에서 움직이기 때문에 이 복잡함을 감수할 수밖에 없다.


현실의 문제는 깔끔한 문제풀이처럼 주어지지 않는다. 사용자 인터뷰에서 얻은 말은 겉으로는 명확해 보이지만 실제 행동과는 다른 경우가 많고, 정량 데이터는 객관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 역시 특정 맥락에서 수집된 편향된 정보일 때가 많다. 디자인은 이런 모순된 정보들 사이에서 가장 ‘덜 틀린 선택’을 해나가는 과정이며, 이것이 바로 확률적 사고가 필요한 이유다. 문제를 해결할 때 필요한 건 완벽한 공식이 아니라 불확실성을 감당하는 태도다. 누구보다 빠르게 답을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어떤 답도 잠정적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는 사람이 오래 남는다.


현장에서 의사결정을 내려야 할 때가 많다 보니, 처음에는 확신을 가지고 말하는 사람이 더 능력 있어 보이기도 하고, 논리를 매끄럽게 정리하는 사람이 더 설득력 있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정답을 말하는 사람보다 변화의 신호를 잘 읽는 사람이 결국 더 오래 신뢰받는다는 사실을 많이 보게 된다. 어떤 선택도 영원히 맞지 않고, 어떤 해결책도 상황이 바뀌면 다른 문제를 불러오며, 어떤 화면도 한 번에 완벽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디자인은 반복과 조정의 직업이고, 반복과 조정은 불확실성과 함께 움직일 때 비로소 의미가 있다.


확률적 사고는 일종의 감정 관리이기도 하다. 정답을 찾아야 한다는 부담은 책임을 불필요하게 무겁게 만들고, 작은 오류도 큰 실패처럼 느껴지게 한다. 반면 확률적 사고는 나를 조금 더 자유롭게 만든다. ‘이 선택이 완벽하진 않아도 지금 시점에서는 이게 가장 자연스럽다’고 스스로에게 설명할 수 있고, 만약 예상이 틀리더라도 그건 잘못된 판단이 아니라 불확실성을 통과하는 과정이었다고 받아들일 수 있다. 이런 태도는 스스로를 지치지 않게 하고 팀의 리듬을 흐트러뜨리지 않으며, 오히려 다음 선택을 더 차분하게 만들 수 있는 여유를 준다.


디자인 시스템을 운영할 때도 마찬가지다. 색을 몇 단계로 나눌지, 텍스트 스타일을 얼마나 세분화할지, 컴포넌트 구조를 어떤 방식으로 정리할지 같은 문제들은 모두 ‘정답이 있는 문제’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팀에게 맞는 확률을 고르는 문제에 가깝다. 표준을 너무 단단하게 만들면 실제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고, 너무 느슨하게 하면 시스템을 유지할 이유가 사라진다. 그래서 최적의 정답을 만드는 게 목표가 아니라 팀의 성격, 서비스의 상황, 작업 방식에 따라 ‘지금 가장 유지하기 쉬운 선택’을 이어가는 것이 중요하다. 시스템은 정답이 아니라 흐름이다.


협업에서도 확률적 사고는 중요하다. 서로 다른 경험과 이해관계를 가진 사람들이 함께 의사결정을 내려야 할 때, 정답을 찾으려고 하면 대화는 금방 충돌로 이어진다. 각자의 정답이 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확률을 기준으로 삼으면 대화는 좀 더 부드러워진다. ‘이 선택은 위험이 너무 크다’, ‘지금 이 타이밍에는 이 정도의 수정이 가장 현실적이다’, ‘이 가설을 검증하려면 이 정도만 먼저 해보는 게 좋다’ 같은 언어는 누구의 의견이 옳은지 따지는 방향이 아니라, 어떤 선택이 팀 전체에 가장 자연스러운 흐름을 만들지를 중심으로 판단하게 만든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확률적 사고는 단순히 실무의 기술이 아니라 일하는 태도에 가깝다. 정답이 없는 상황을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 예상이 틀리더라도 스스로를 몰아붙이지 않는 마음, 모르는 상태로 잠시 머무르는 걸 견디는 마음 같은 것들이다. 일이라는 건 결국 이런 마음의 구조와 많이 닮아 있다. 프로젝트가 시작될 때는 밝고 새로운 계획이 있지만, 실제로 그 계획은 중간에 여러 번 방향을 틀어야 하고, 때로는 반쯤 돌아가야 하기도 하고, 어떤 날에는 처음 생각한 목표가 의미 없어 보일 때도 있다. 그때 필요한 건 정답이 아니라 계속 살아남을 수 있는 힘이다.


그래서 나는 어느 시점부터 정답이라는 단어에 크게 집착하지 않게 되었다. 그 대신 ‘지금 이 선택의 확률은 어떤가’ ‘이 결정이 큰 흐름을 흔들 가능성은 얼마나 되나’ 같은 질문을 스스로 던진다. 이런 질문은 나를 조금 더 차분하게 만들고, 작은 불확실성에도 덜 흔들리게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일이라는게 결국 정답을 찾는 일이 아니라 불확실함 속에서도 계속 걸어가는 일이라는 사실을 조금은 편안하게 받아들이게 한다.


정답은 시대와 기술과 상황이 바뀌면 금세 낡아버리지만, 확률을 읽으려는 태도는 오래 남는다. 변화가 많은 시대일수록, 예측이 어려운 환경일수록 확률적 사고는 나를 지키는 가장 현실적인 도구가 된다. 능력보다 오래가는 건 태도이고, 그 태도는 내가 만들어가는 세계의 리듬을 결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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