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의미다 - 175
숫자 ‘0’의 탄생은 9세기경 인도에서 가장 먼저 사용했다. ‘0’은 ‘공백’이나 ‘부재(없음)’를 뜻하는 종교적인 용어 ‘슌야(śūnya)’에서 왔다. 우리가 알고 있는 아라비아숫자는 처음엔 1~9까지만 사용하다가 십, 백… 등과 같이 큰 수를 나타내기 위해 ‘공백’→‘●’ →‘0’순으로 사용했다(‘2 2’ → ‘2●2’ → ‘202’).
원래 고대인은 하나와 여럿만 구분할 수 있었고, 개수를 세지 못했다. 당연히 ‘없는 것’을 표현할 일이 없었으므로 ‘0’은 필요하지 않았고 그래서 출현하지도 않았다.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아라비아숫자는 아라비아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이렇게 인도에서 먼저 시작되었으니 ‘인도숫자’라 해야 올바르다. 0을 가장 먼저 사용한 인도에서 수학도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아라비아숫자는 10세기경에 유럽으로 전달되었으나 처음에 ‘0’은 환영받지 못하다 13세기가 되어서야 피보나치에 의해서 자리를 잡게 되었다. 하지만 그리스인은 0과 진공, 무한과 무한대를 16세기까지도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 결과 수학과 과학은 결코 전진할 수 없었고 발달하지 못했다. 비어 있는 자릿수를 표시하기 위한 기호에서 수를 쓰고 계산할 때 편리한 숫자로 당당하게 인정받은 ‘0’, 아무것도 없다는 의미로, 시작점을 나타내는 숫자로, 양수와 음수의 방향점을 가르는 기준점이 되었다.
아무것도 아닌 공백에서 출현한 ‘0’(zero)은 비할 데 없이 막강한 숫자가 되었다. 0은 왼쪽에 숫자가 있고 자신은 오른쪽에 있어야만 의미가 있다. 숫자의 왼쪽에 있는 0은 아무것도 아니다. 0은 양수와 음수를 가르는 수이며 짝수다.
스마트폰이나 컴퓨터 자판에 0은 아라비아숫자 키의 끝에 위치하는 이유는 우리가 무엇을 셀 때는 항상 1에서부터 시작하기 때문이다. 1은 뭔가를 셀 때 적절한 출발점이었다. 이렇게 어떤 것을 세거나 순서를 정할 때 0의 위치는 부자연스러웠고 숫자 맨 뒤나 맨 아래에 놓이게 된다. 또한 0은 커지기를 거부하고, 또 다른 어떤 수를 키우지도 않는다. 0을 더하거나 빼도 크기는 변하지 않는다. 다만 모든 수에 0을 곱하면 0(자신)이 되어 수직선에서 점이 된다. 또한 0으로 나누면 수학의 전체 체계가 파괴되어 가장 큰 문제가 생긴다. 이렇게 간단한 0은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었고 인류 문화사에 위대한 발견 가운데 하나로 가장 중요한 수학의 도구가 되었다. 이렇게 기이한 0의 수학적 속성 때문에 서양 철학과의 충돌을 피할 수 없어 2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서양에서는 0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고등학교 때 수학 시간을 그리 괴롭혔던 미적분이 바로 0의 개념을 도입한 결과다. 뉴턴이 만유인력을 발견했다는 사실은 초등학생도 아는 사실이지만, 그 골치 아팠던 미적분이 뉴턴의 아이디어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0의 개념이 받아들여지지 않던 시절 뉴턴이 자신의 발견을 감추고 있는 사이에 라이프니쯔가 무한소의 미적분을 개발했기 때문이다. 뉴턴의 미적분법인 유율법에서 미분 dx/dy→0은 0÷0을 받아들임으로써 시작되었다. 듣기만 해도 골치 아픈 미적분도 0 덕분(때문)에 개발되었다는 이야기다.
앞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0은 자리 기호였고, 바빌로니아 기수법에서 빈자리를 나타내는 데에 쓰였다. 0이 유용하기는 했지만, 값이 없으므로 그 자체로 진짜 수는 아니었다. 그것은 왼쪽에 있는 어떤 수를 통해서만 의미를 가지며 사실상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았다. 하지만 인도에서는 모든 것이 변했다. 인도인들은 0의 일반적인 특징 때문에 0을 아주 괴이한 수로 여겼다. 0은 무엇을 곱하든지 0이 되어 모든 것을 자신 속으로 빨아들인다. 또한 0으로 나누면 연산의 체계를 파괴하는 혼란이 온다. 0÷0과 1÷0이 무엇인지 밝혀내려 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한참 후에야 인도인들은 1÷0이 ∞(무한대)임을 깨닫게 되었다.
0과 ∞(무한)은 쌍둥이로 소실점과 연결된다. 0을 곱하면 수직선이 점으로 붕괴하는 것처럼, 소실점은 대부분의 물체가 작은 점에 모이게 한다. 물체에 0을 곱하여 점으로 보이게 한 것이 소실점인 것이다. 이렇게 초기 시기에는 수학자보다 화가들이 0의 속성에 대해 조금 더 많이 알고 있었다. 이 때의 화가들은 아마추어 수학자였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원근법 및 그림에 관한 여러 책을 썼는데 ‘수학자가 아닌 사람은 이 책을 읽지 말라’고 경고문을 써놓기도 했다. 수학자이자 화가인 이들은 원근법을 완성했으며 곧 모든 3차원 물체를 묘사할 수 있었다. 이제 화가들은 평면적인 세상에 갖혀 있지 않게 되었다. 이렇게 0은 미술계를 변화시켰다.
확률과 0과 ∞의 개념을 이용한 기독교인과 무신론자의 기대값에 대한 ‘파스칼의 도박’도 유명하다.(기독교인이 되라는 것은 아님)
1. 기독교인 기댓값 – 신이 없다면 죽을 때 무로 사라짐(무로 사라질 가능성 1/2 – 1/2×0=0), 신이 있다면 천국에 가서 영원한 행복(천국으로 갈 가능성 1/2 – 1/2×∞=∞) 무한의 절반은 여전히 무한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이라는 가치는 무궁무진하다.
2. 무신론자의 기댓값 – 신이 없다면 무로 사라짐(무로 사라질 가능성 1/2 – 1/2×0=0), 신이 있다면 영원히 지옥에 감((지옥으로 갈 가능성 1/2 – 1/2×-∞=-∞) 무신론자의 경우 기댓값은 음의 무한대로, 얻을 수 있는 가장 나쁜 값이다. 현명한 사람은 분명히 무신론자 대신 기독교인을 택할 것이다. 그런데 신이 존재할 확률이 1/2이 아니고 1/1000밖에 안된다 하더라도 무로 사라질 가능성(999/1000×0=0), 천국에 갈 가능성(1/1000×∞=∞). 결과는 여전히 같다. 기독교인의 기댓값은 여전히 양의 무한, 무신론자의 기댓값은 여전히 음의 무한이다. 유신론자가 되는 것이 훨씬 유리하다. 유일한 예외는 신이 존재할 확률이 0일 경우다. 신이 존재할 가능성이 없다면 ‘파스칼의 도박’으로 알려진 이 도박은 무의미하다.
‘제로섬(zero-sum game) 게임’이라는 것이 있다. 게임을 하는 모든 참가자의 점수를 전부 합산하면 반드시 영(zero, 0)이 되는 게임이다. 즉, 누가 얻는 만큼 반드시 누가 잃는 게임을 말한다. L. C. 더로의 『제로섬 사회』가 1971년에 발간되면서 유명해진 용어로, 게임 이론과 경제이론에서 주로 쓰인다. 주식, 금융 시장이 제로섬 게임이냐 아니냐를 가지고 경제학적으로 많은 논쟁이 있는데 누군가가 손해를 보면 그만큼 이득을 얻는 사람이 발생하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1:1로 싸워서 누구는 이기고 누구는 지는 대부분의 프로 스포츠나 체스, 장기 같은 게임들은 모두 제로섬 게임이다. 누가 1승을 얻기 위해서 누구는 1패를 해야 한다. 단순히 승/패가 아니고 골득실 등을 따질 때도 자신이 1 득점함은 상대방이 1 실점함을 의미하므로 제로섬 게임이 된다. 반대로 한 쪽의 득점이 많아도 다른 쪽에게 별로 손해가 없는 관계이거나 그 반대의 관계이면 ‘넌제로섬 게임(non zero-sum game)’이라고 한다. 득/실의 합이 0이 아니고 둘 다 이득이 되는 ‘윈윈 효과’가 나오는 경우, 둘 다 손해가 되는 경우 등이 있다.
사람들은 모두 하나, 둘, 셋으로 셈하지 영, 하나, 둘로 세지 않는다. 한 달도 1부터 시작하지 0부터 시작하지 않는다(마야인은 한 달을 0부터 시작했다). 어딘지 모르게 부자연스럽게 여겨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거꾸로 세어 내려갈 때도 있다. 3, 2, 1, 0(발사) 우주왕복선을 하늘로 치솟기 전에 언제나 0을 기다린다. 이렇게 중요한 사건들은 1시가 아니라 0시에 일어난다. 또한 사람들은 0이 많이 들어간 깔끔히 떨어지는 수를 좋아한다. 또한 뭔가 부족할 때 뒤에 0을 하나 더 붙이고 싶어 한다. 지금 당장 내 주머니에 있는 돈에 0을 하나 더 붙이고 싶기도 하다.
‘영순위(零順位)’는 첫 번째 순위보다 앞선 차례라는 뜻으로, 어떤 일보다도 가장 우선시되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어떤 일에서 가장 우선적인 자격을 가지는 순위라 할 것이다. 사랑하는 연인 사이에 가장 찐한 사랑 표현으로 ‘당신은 0순위야~!’ ‘사랑은 0순위야~!’라고 말한다. 그것도 모자라 영원한 0순위라는 뜻으로 ‘00(영영)순위’라고 하기도 한다. 아라비아숫자의 가장 뒤에 놓였던 0(…8, 9, 0)이 가장 앞으로 이동하는 순간(0, 1, 2…) 절대적 순서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0순위는 범접할 수 없는 순서가 되었다. 하지만 ‘0순위’라는 것은 때로는 그 어떤 것보다 중요하지만 때로는 아무것도 아닐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촌수로 0촌(寸), 즉 무(無)촌(寸)이 있다. 바로 가장 가깝다는 부부가 무촌이다. 하지만 가장 먼 남이 될 수 있는 사이라는 말이다. ‘0’이라는 숫자의 모호함이다.
지금까지 나는 누군가의 영순위가 된 적이 있는가? 그리고 내 영순위는 누구인가? 부모, 자식, 배우자가 떠오르지만, 누가 뭐래도 내 영순위는 나 자신이 아닐는지. 그런 나를 위한 영순위를 찾아야 할 시점이다. 아울러 독자님들의 간절한 영순위 희망 사항이 이루어지길 빌며 오늘도 정진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