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를 만들어 내는 건 결국 어른
카페에서 아기가 돌아다닌다. 너무 귀여워서 자꾸 눈이 간다. 어떤 사람들은 노키즈존을 좋아하거나 아기가 시끄럽게 하면 인상을 찌푸리지만 어느 선까지는 나는 그 시끄러움조차 귀엽다. 안 그래도 어제 구글포토에서 무슨 사진을 찾다가 두 돌도 안된 어린 첫째의 영상을 보고 너무 행복했는데. 이 아침부터 남의 집 아이를 보는데 기분이 말랑말랑, 달콤해진다.
원래도 아기를 좋아했는데 점점 더 좋아진다. 너무 예쁘다. 이렇게 말하면 열에 아홉은 꼭 이런 말을 한다. "셋째 어때? 크큭" 뒤에 '크큭'하고 웃는 까닭은 실현 가능성이 거의 없음과 농담이 많-이 섞였음을 의미한다. 나도 그런 말은 들을 때마다 웃겨서 "말도 안 돼. 무슨 소리야아."하고 웃어넘긴다. 어린 아기, 아이들을 특별히 귀여워하다 보니 내가 어릴 적 가족들은 커서 유치원 선생님을 하면 잘하겠다는 말도 많이 했었다. 하지만 난 딱히 그 귀여워하는 마음을 직업으로 실천할 마음은 먹어본 적이 없다.
아이들을 보면서 많은 걱정과 생각을 한다. 다행히도 주변에 좋은 말을 해주는 사람들이 많다. 육아가 어렵고 힘들 때면 그래봐야 몇 년 안 남았다고 지금에 최선을 다하라고. 사실 나도 다 알고는 있지만 자꾸만 잊고 마는 그런 얘기들을 되새겨 주는 지인들 덕에 매일 힘을 내고 내 마음을 다독인다.
요즘 나의 고민은 아이를 보는 나의 눈과 세상의 눈이다. 거기에 한 스푼 추가하자면 그런 눈들로 인해 영향받는 아이의 마음까지.
나도 어린 시절을 떠올려 보면 늘 조금씩 늦는 아이였다. 항상 내가 핑계로 들먹이는 '빠른 년생'이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그런 거 상관없이 그냥 그랬다. 친구들과의 사이도 몇 년 뒤 돌아보면 이불킥 할 일들이 종종 생겼고, 일이 년만 늦게 입학했어도 똘똘한 애들처럼 그 학년에 잘 맞췄을 거라고 생각하곤 했다. 수학, 과학.. 학업에 대한 이해도도 결코 빠르지 않은 아이였다. 결국 대학은 재수를 했고, 평범한 대학에 들어갔으며 지금까지 그냥저냥 소소하게 살고 있다.
그런 나를 닮은 건지, 나의 아이도 결코 빠르지 않다. 문과적 성향은 나랑 비슷해 언어가 빠르긴 했다. 공부도 중간은 한다. 하지만 정리정돈, 대인관계 등에서는 빠릿하고 야무지지 못한 것도 마치 나와 같다. 결론적으로 보자면 살아가는 데에 아무 문제는 없는 소재다. 유년기의 그런 속도 차이는 결국 성인이 되어 다 맞춰지기에, 멀리서 보면 고작 몇 년 차이로 다들 어른이 되고, 철이 들고, 다듬어지니까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어떤가. 매일 세포분열을 하고 몸 구석구석이 자라느라 안 그래도 힘든 아이들에게, 마음까지 빨리 크라고 부채질하고 재촉하고 있진 않나 말이다.
엄마가 되고 나서도 나는 느렸다. 몇 살에 아이를 낳았는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냥 엄마가 되고 나서, 그 상황에 익숙해지고 육아관을 잡아가는 데 걸리는 시간이 남들보다 오래 걸린 것 같다. 내 핏줄이고 내 아이이니 당연히 너무 귀여워했고 예뻐했지만 일관성이 없었다. 둘째가 태어나고는 더했다. 2년 동안 아이에게 화 한 번 낸 적 없던 내가(당연하지 두 돌도 안 된 갓 태어난 아기에게 화낼 일이 어디 있겠는가) 둘째가 태어나고는 버럭버럭 소리까지 지르게 되었으니 말이다. 한없이 예뻐하다가도 빨리 잠들지 않는다고 소리 지르고, 물을 쏟았다고 뭐라고 하고. 동생 자는데 소란 피운다고 뭐라고 하고.. 주변에선 두 돌까지 아이에게 짜증 한번 내지 않은 게 더 대단한 거라고 하지만, 내 상황이 조금 힘들어진다고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를 채근하고 혼냈다는 게 지금 생각하면 참 한심하기만 하다.
어쨌든 우리의 시간은 빠르게 흘렀고, 나 역시 느리지만 꾸준히 성장해 아이들을 대하는 태도 역시 계속해서 다듬어 가고 있다. 어제의 나보다 오늘의 내가 낫다고 생각한다. 그렇다. 하물며 나도 그럴진대. 우리 아이는 어떤가.
아이들은 학년마다 반이 바뀐다. 담임 선생님도 같이 바뀐다. 선생님들의 교육관도 모두 다르다. 아이에게 기대하고 요구하는 것도 당연히 달라진다. 모두 다 잘하는 아이들도 있다. 어떤 상황에도 잘 적응하고 빠르게 스며드는 아이들. 유니콘 같은 아이들 외에도 대다수가 학년이 올라가며 눈치껏 잘 적응하며 학교생활을 해낸다. 그것 역시 인생 공부다.
하지만 조금 늦된 경우는 그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다. 큰 일은 아니다. 그것 역시 아이에게 자극이 되어 발전이 될 수 있으니. 하지만 일이 좀 더 커진다면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 똑같은 행동이나 성향에 대해서 선생님마다 해석과 반응이 다르다. 예를 들어 책상 정리정돈이 잘 되지 않는 것에 대해 어떤 학년의 선생님은 괜찮다고, 1학기 때보다 2학기가 되어 정말 많이 좋아졌으니 괜찮은 거라고. 아이들마다 속도 차가 있는 거라고 말씀하신다. 또 다른 선생님은 거기에 말을 더 붙이신다. 그래도 우리 반 아이들 중에선 늦는 편이니 개선이 필요하다고. 나에게 아이에 대해 적나라하게 불만사항을 이야기하신다. 한편으론 엄마인 내가 느끼는 걸 선생님도 다 알고 계시니 그 관심에 너무 감사하면서도 걱정도 된다. 나야 엄마니까 아이에 대해 작은 것도 고쳐주고 싶고 더 호되게 말하고 생각하지만, 내가 아닌 타인이 아이에 대해 그렇게 말하는 것엔 불안감을 느낀다. 친구들 앞에서도 지적을 하시니 모두의 앞에서 작아지는 아이가 안쓰럽다.
딱 이 부분만 보면 혹시 아이가 문제행동을 하거나 남에게 피해를 주는 건가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런 쪽은 아니다. 그냥 혼자 가끔 좀 어수선할 뿐이다. 걱정되는 건 헷갈려할 아이 본인이다. 같은 행동에 대해 어떤 선생님은 아이 자체를 보며 느리지만 성장하고 있는 점을 응원해 주셨다면 어떤 선생님은 다른 친구들의 성장과 비교하며 그 속도에 빨리 따라오라고 혼을 내시니까.
내 마음은 이렇게 저렇게 갈대처럼 흔들리고, 당연히 아이에 대해 좋게 말해주는 쪽으로 기울기 마련이지만 자꾸만 중심을 잡아보려 애써본다. 아이를 위해 뭘 해주는 게 과연 최선일까를 생각해 본다. 그런 나의 고민 끝 결론은 이거다. 이렇게 아이를 향해 마음속으로라도 내 마음을 전해주고 싶다.
"바깥에서의 변화에도 적응해야 해. 그게 사회생활이야. 성장 과정에서 꼭 필요한 부분이고. 어떻게 주변에 같은 사고방식을 갖고 동일한 조언을 해주는 사람만 있을 수 있겠어. 지금의 선생님, 그때의 선생님 두 분 다 누가 옳다 그르다 판단할 수는 없어. 그냥 다른 거야. 학교를 벗어나 사회에 나가게 되면 더 많은 사람들과 다양한 가치관을 만나게 될 거야. 지금의 학교생활은 그걸 미리 경험하는 거야. 하지만 엄마는 평생 한 명이잖아? 엄마는 계속 한결같을게. 널 계속 응원할게. 너 스스로의 속도와 변화를 믿고 기다려 줄게. 내가 기다려 준다고 표현하는 것도 웃기다. 그냥 널 바라볼게. 작은 습관을 고쳐주려다 너와의 관계를 망치고 싶지 않아. 엄마도 좀 더 멀리서 바라보고, 지금의 너를 있는 그대로 사랑해 줄게. 이러고 또 실수하고 널 채근할지 몰라. 그래도 엄마는 널 사랑해. 그건 변하지 않아. 엄마도 그랬어, 괜찮아. 천천히 가자."
그런데 막상.. 이 모든 걸 나만 고민하는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아이는 아무렇지 않게, 행복하게 학교생활을 하고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그렇담 너무 기특하다.
걱정과 고민과 문제를 만들어 내는 건 결국 모두 어른들이다.
나도 그중의 한 명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