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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가 문을 열고 들어오고 있었다.

(1편에서 이어집니다)

34평의 아파트는 남자 셋이 기척 없이 있기엔 쉽지 않은 넓이였다. 게다가 한시도 가만히 있지 않은 아이들이 이렇게 조용하다니. 평소 같으면 손부터 씻고 나와 아이들을 한 번씩 안아주고 저녁은 뭘 먹냐며 은근한 채근에 들어갔을 지혁 역시 보이지 않았다. 얇은 면티를 걸친 팔에 얕게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며, 은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너무 생각에 오래 잠겨 있었나, 아니면 나도 모르게 잠깐 졸았나, 생각하며 안방과 아이들 방 그리고 화장실과 베란다까지 모두 훑었다. 이상했다. 아무도 없었다. 더 이상한 건, 안방은 더 이상 안방이 아니었고 아이들 방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이었다. 안방이었던 곳은 은서가 그토록 꿈꾸던 완벽한 모습의 서재였고, 아이들 방이 있어야 할 곳엔 역시 너무나 갖고 싶던 은서만의 드레스룸이 있었다. 아이들 공부방으로 쓰던 나머지 하나의 방엔 침대가 하나 놓여 있었다. 모든 것이 너무나 낯설지만 동시에 무척이나 익숙한 공간. 분명 처음 보는 가구와 물건들인데 하나같이 은서의 취향과 기호가 묻어 있었다. 서재와 침실 사이의 화장실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은서가 좋아하는 우드톤의 욕실 용품으로 세팅되어 있었고, 칫솔 살균기 속 칫솔은, 두 개가 있었다. 아, 뭐지. 

이건 꿈이라고 생각하며 온 집안을 훑어보며 잠시 즐겁기까지 했다. 이런 꿈이라면 일단 좀 더 오래 머무르고 싶었다. 꿈인데 뭐 어때, 아이들과 남편이 갑자기 보이지 않는 것쯤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잠깐 사이에 밀폐된 집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 리 없었고 이런 행복한 꿈은 요즘처럼 삭막한 생활 속에 좀처럼 꾸기 어렵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기에. 그렇게 자신도 모르게 피어난 미소에 입까지 살짝 벌린 채 집안 곳곳을 살피던 -마치 남의 집 집들이 온 마냥- 은서는 완벽하게 정돈된 부엌 찬장의 유리컵을 구경하다 그만 손이 미끄러졌고, 컵은 손을 떠나 대리석 바닥에 안착하며 쨍그랑 소리와 함께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드라마를 보면 꼭 등장인물이 깨진 접시나 컵을 그냥 두지 않고 곧바로 맨손으로 치우려다 꼭 손이 베고 말던데. 이번엔 은서가 바로 그 비련의 여주인공이었다. 예쁜 컵이 깨져 안타까운 마음에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고, '아야' 소리와 함께 붉은 피가 스며 나왔다. 똑, 똑, 혈관을 제대로 건드렸는지 말간 바닥에 대조되듯 강렬한 색의 핏방울이 고이기 시작했다. 놀란 것에 이어 고통이 시작됐다. 아.. 아프다. 이제 꿈에서 깨어나겠군. 그런데 왜 아프지? 꿈인데. 그리고 왜 아직 이러고 있는 거야. 깨어나지 않잖아. 아픈 것은 둘째치고 다시 팔뚝에 우수수, 아니 이번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이상하다. 아직도 너무나 조용한 이 공간에서, 그것도 모든 것이 바뀐 낯선 인테리어로 덮힌 집에서 은서 홀로 깨진 컵의 파편 속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흩어진 유리 조각만큼 그녀의 머릿 속도 부산스러웠다. 너무나 많은 생각이 오갔다. 이게 뭐지, 내가 정신이 나갔나. 혼란스러웠다.

그 와중에도 일단 난장판이 된 바닥과 손을 처리해야겠다 싶었다. 그리고 좀 차분히 상황을 되짚어봐야겠다 생각했다. 최대한 다른 곳은 짚지 않도록 애쓰며 조심조심 일어섰고, 싱크대 물을 틀고 피를 닦아낸 다음 박힌 유리조각을 빼냈다. 짚히는 대로 옆에 보이는 키친타월로 지혈을 하니 다행히 피는 금세 멈췄다. 빗자루나 청소기를 찾아다니기 어려우니 일단 키친타월을 한번 더 활용해 컵의 잔해를 치웠다. 다용도실에 휴지통이 보였고, 10분도 채 되지 않아 은서는 사고 현장을 깔끔하게 정리할 수 있었다. 


부엌엔 원래 집에 있던 10년 넘은 커피머신 대신 은서가 가지고 싶던 브랜드의 신상 머신이 자리하고 있었다. 다시 봐도 이 집은 은서가 원하던 모습을 완벽하게 만들어 놓은 곳이었다. 모든 물건이 다 최신상이라는 게 아니었다. 오래된 물건과 책도 있었다. 그저 은서의 취향을 백 퍼센트 반영해 둔 것 같았다. 누군지 몰라도 은서보다 은서 자신을 더 잘 아는 이가 만들어둔 세트장 같았다. 평소 해리포터 같은 류의 책과 타임슬립 드라마류를 좋아해서 그런 건가, 꿈이 참 스펙터클 하다 생각하며 은서는 커피를 내렸다. 아까 깨뜨린 유리컵 윗 줄엔 깔끔한 미색의 머그컵이 있었다. 머그컵 역시 두 개. 아까 화장실에서도 칫솔이 두 개였던 것이 떠올랐다. 너무나 완벽히 자신의 공간이라 느껴지는 이 집에 누가 또 함께 살고 있다는 건가, 아니면 그냥 손님용으로 2개가 있는 건가. 컵은 그렇다 쳐도 칫솔은 이상했다. 손님 칫솔을 누가 개봉해서 살균기에 넣어둔단 말인가.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거렸고, 그렇다면 동거인은 누굴까 잠시 궁금해했고, 혹시 내가 지금 너무나 완벽한 싱글의 삶을 꿈꾸고 있는 건가 그렇다면 깨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닿았고, 애들과 남편이 사라졌는데 한가하게 이딴 걸 궁금해하고 있는 자신이 갑자기 너무나 어이없고 소름 끼쳐서 마침내 은서는 하, 하고 짧은 코웃음을 쳤다.

우드톤과 아이보리색 대리석으로 온화하게 짜인 아일랜드 식탁의 바체어에 앉아 커피를 한 모금 들이키자 깊고 진한 향이 온몸을 감싸는 기분이 들었다. 우리 집에 있는 머신도 이걸로 바꿔야겠다, 은서는 중얼거렸다.

그래. 일단 정신 차리고 뭘 좀 알아보자, 생각했다. 그러려면 먼저 휴대폰을 찾아야 했다. 현대인의 모든 것을 담고 있는 것은 바로 스마트폰이다. 그걸 보면 뭔가 알 수 있을 거야. 일단 이건 꿈이 아닌 것임에 틀림이 없었다. 확실하진 않았지만 아무래도 꿈같지는 않았다. 전화기가 어디 있지, 은서의 시선이 서재에 가 닿았다. 그래. 저기 있겠다.


서재엔 은서가 그토록 갖고 싶어 하던 가구 브랜드의 높이 조절이 되는 책상이 있었다. 자주 가던 쇼핑몰 서점 앞에 진열되어 있던 이 책상을 볼 때마다 나는 언제 저걸 가져보나 매번 아련히 바라만 보던 것이었다. 스위치로 손을 뻗어 보려던 은서는 다시 고개를 휘저으며 찾던 것에 신경을 집중했다. 그리고 책상 맞은편에 있는 작은 티테이블 위, 독서대 옆에 얌전히 놓여있는 전화기를 발견했다. 순간이지만 여기서 은서는 독서대가 집에서 쓰던 것과 같은 제품인 것에 잠시 놀랐다. 몇 주 전 구입한 이 독서대는 은서가 심사숙고해서 고른, 은서의 물건 중 아주 만족스러운 몇 안 되는 것 중 하나였다. 역시 이 집은 온전히 내 스타일이야, 또 한 번 생각했다. 

전화기는 최신형 휴대폰이었다. 이왕이면 4년이나 쓰고 있는 지금 전화기와 다른 a회사의 제품이길 내심 바랐는데 아니었다. 같은 브랜드의 제품이었고, 이젠 이 상황에 익숙해진 듯 본인의 취향은 어쩔 수 없이 이 폰인가 보다 생각했다. 마치 지금 이 집의 모든 것들은 은서 본인의 취향을 담은 것이라는 가정이 확실하다는 듯.

전화기에는 비밀번호가 걸려 있었다. 잠시 좌절했지만 지문도 동시 등록이 되어 있어 무사히 화면을 열 수 있었다. 화면이 켜지자 갑자기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최신 통화 목록엔 누가 있을까, 이게 지금 현실일까 그게 가장 궁금했다. 전화 폴더의 최신기록을 터치하자 맨 윗줄에 낯익은 이름이 보였다. 최지혁, 남편의 이름이었다. 


그래 다행이다. 이건 꿈이 아닌 거야. 그럼 난 뭐지? 내가 기억상실증에라도 걸렸나? 아니면 치매? 뭔가 충격적인 사건으로 인해 최근의 기억을 잊은 건 아닌가 은서는 혼란스러웠다. 똑같은 구조의 집에 가전과 가구, 물건들이 바뀌었고 전화기 속 가장 통화를 많이 한 사람의 이름은 남편의 이름인 상황. 나머지 통화 목록을 봐도 대부분 엄마, 아빠 또는 지혁이었고 이상한 느낌이 들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녀는 잠시 기억을 잊은 게 분명했다. 아 그럼 사진첩을 봐야겠다. 왜 이것부터 볼 생각을 못했지, 중얼거리며 은서는 갤러리를 열었고 동시에 눈이 휘둥그레 해졌다. 온통 모르는 얼굴뿐이었다. 은서 자신의 얼굴만 익숙했고, 함께 웃으며 카메라를 바라보고 있는 다른 사람들은 모두 알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갑자기 정신이 아득해지며 다시 심장이 쿵쾅댔다.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뭐가 뭔지 하나도 알 수가 없었다. 사진 속 자신과 함께한 사람들, 장소, 무언가 일을 하고 있는 듯한 모습 모두 낯설었다.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 이상한 터널 속에서 허우적 대는 기분이었다. 그때  익숙한 소리가 들려왔다.

띠띠띠-

누군가가 문을 열고 들어오고 있었다. 누굴까, 은서는 본능적으로 숨을 곳을 찾았다. 

(다음 편으로 이어집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같은 라인 다른 집으로 순간이동이라도 한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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