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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잘생겼다

(2편에서 이어집니다)

급히 주변을 살피니 세워져 있는 전신 거울 뒤로 공간이 있었다. 한쪽은 나무로 된 간이 옷걸이가 가리고 있어 문쪽에서 보면 잘 가려질 것 같았다. 숨기에 제격이었다. 자신의 빠른 스캔에 감탄하며 은서는 몸을 숨겼다. 드르륵-

중문을 열고 누군가가 집안으로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쿵쿵, 쿵쿵. 심장 소리가 자신의 귀까지 울리는 것 같았다. 누굴까. 이곳에서의 지혁일까. 휴대폰 사진첩을 다 확인한 건 아니었지만 직감적으로 알 것 같았다. 이 세계에서의 지혁은 내가 아는 지혁의 얼굴이 아닐 것 같았다. 이렇게 숨는 것이 능사는 아니라는 것도, 만약 내가 기억을 잠시 잃은 거라면 이건 남이 볼 때 정말 웃기는 행동이라는 것도 알았다. 영화 <내 머릿속의 지우개>에서의 손예진처럼 나도 그런 모습일까. 손예진은 예쁘니까, 알츠하이머로 인해 서서히 변해가는 모습도 그저 짠했는데 나는 어떨까. 별 시답잖은 생각이 찰나에 스쳐갔다. 아니 그게 예쁜 거랑 무슨 상관이람. 인간의 생각하는 능력은 참 대단했다. 분명 최대치로 능력을 발휘하면 컴퓨터보다 훨씬 똑똑한 건 말할 필요도 없는 문제라 생각했다.

짧은 시간 이런저런 공상에 빠진 채로 숨죽이고 있는데, 집안으로 들어온 누군가는 더 이상 기척이 없었다. 뭐지, 다시 나갔나? 그렇다면 확인을 좀 해볼까. 은서는 구겨진 몸을 천천히 일으키며 거울 뒤에서 빠져나왔다. 몇 분 숨어있지도 않았는데 그새 다리가 저려왔다. 운동을 좀 해야겠다 중얼거리며 허리를 펴고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 은서는 깜짝 놀라 뒤로 나자빠질 뻔했다.

꺅, 외마디 비명과 함께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상대방은 은서를 바라보며 빙긋 웃었다. 아, 잘생겼다. 가장 먼저 든 생각이었다. 그런데 뭐야. 얜 누군데 날 보고 이렇게 웃어? 아무리 봐도 처음 보는 사람이었는데 누군가를 닮긴 닮았다. 누구더라, 그래. 현세계에서 은서가 괜찮다고 생각한 배우와 닮았다. 뭐야 여긴. 이 집도 그렇고 이 사람도 그렇고, 내가 진심으로 원하고 바라던 것들이 이루어지는 세계야 뭐야? 그렇다면 혹시 이 사람이.. 지혁?

친근하게 웃고 있는 -아마도 지혁으로 추정되는- 인물을 바라보며 은서는 똑바로 몸을 일으켰고, 비틀거리는 몸을 바로 세우려 애쓰며 자연스러운 척 표정 관리를 했다.

- 와, 왔어?

그러자 그는 은서가 넘어지지 않게 어깨를 살짝 잡아주며 말했다.

- 오늘도 여기 숨었어? 장난은.

그는 여전히 미소 띤 얼굴로 은서의 머리를 손바닥으로 헝클이고는 익숙한 자세로 코트를 벗어 바로 옆 옷걸이에 걸었다. 가만히 서있는 것이 어색한 은서는 부엌으로 나가며 물었다.

- 어.. 커피 마실래?

표정을 밝게 해야 할지 말투는 존대를 해야 할지 반말을 해야 할지 몰라 혼란스러운 와중 말이 먼저 나와버렸다.

- 응 그래, 한잔 줘.

그가 밝게 대답하며 따라 나왔다. 휴, 다행이다. 생각하는데 그가 말을 이었다.

- 그런데 웬일로 커피를 자기가 내려줘? 오늘 나 뭐 잘한 거 있어?

아뿔싸. 평소엔 내가 잘 안 해주는 행동인가 보다. 어쩌지.

- 아니, 오늘따라 그러고 싶어서. 커피 한잔하고 싶다고 자기 얼굴에 쓰여 있는데?

어머.. 말이 천상유수다. 은서는 당장이라도 자기 입을 손으로 때리고 싶은 충동을 애써 눌렀다. 신세계에서의 새로운 몸에 저절로 빙의라도 하듯, 현세계에서라면 쓰지 않았을 말투와 호칭이 입에서 마구 튀어나왔다. 좋아 자연스러웠어. 어색해도 이게 맞는 것 같다고 생각하며 은서는 떨리는 손으로 커피를 내렸다. 그러고 보니 처음 보는 커피머신인데도 아까도 지금도 은서는 무척 능숙하게 기계를 다루고 있었다. 이제야 그 사실을 인지하니 머리가 살짝 아파왔다.

그에게서 등을 돌린 채 기계 앞에 서서 한 손으로는 머그잔을 잡고, 한 손으론 이마를 짚고 있는데 허리 옆으로 살포시 손이 들어왔다. 하마터면 들고 있던 커피를 쏟을 뻔했으나 곧 부드러운 촉감에 몸과 마음이 모두 안정되는 기분이 들었다. 뭐지 이 익숙하고 편안한 기분은. 뒤에서 은서를 살포시 끌어안은 채 그가 말했다.

- 근데, 저녁 먹었냐고 안 물어봐? 자기는 오늘도 건너뛰는 거야?

그렇다. 내가 현세계에서 신세계로 온 시간이 저녁 시간이었지. 현실의 지혁이 퇴근을 했었고 이제 저녁을 막 차리려던 참이었는데 정신 차리고 보니 이곳에 와 있었지. 같은 집 같지만 전혀 다른 느낌의 공간에 와 있으니 시간 감각도 다 잃은 모양이었다. 그리고 이 남자의 말에 의하면 이곳에서의 나는 저녁을 늘 챙겨 먹진 않나 보네. 은서는 생각했다. 창가를 바라보니 베란다 창문엔 암막 커튼이 쳐 있어서 마치 창문 없는 백화점에 들어가 있는 양, 시간 인지가 안 되었던 것이었다.

- 응, 나는 배가 안 고파서. 자기는? 먼저 물어봤어야 하는데 미안해.

밥때가 되었는데 커피부터 들이민 것이 진심으로 미안해진 은서는 눈썹 끝을 내리며 물었다. 지혁은 팔을 풀고 뒤로 한발 물러섰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웃었다.

- 하하, 아니야. 나 아까 먹고 온다고 했었잖아. 뭐야, 오늘 좀 이상한데? 아까부터 표정도 그렇고, 좀 평소랑 다른 것 같아서 한번 떠봤지. 무슨 일 있어? 글이 잘 안 써져?

은서는 숨이 훅 멎는 것을 느꼈다. 글이라고, 내가 글을 쓴다고.


현세계에서도 은서는 글을 썼다. 정확히 말하자면 작가 지망생. 이 세상에 수도 없이 많다는 바로 그 '지망생'이었다. 브로치나 사르르 같은 글쓰기 플랫폼에서는 그녀를 이미 작가라고 칭했지만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은서를 작가님이라고 부르기도 했지만- 자신은 스스로를 그렇게 인정하지 않았다. 등단을 하거나 책을 내야 작가지. 라는 막연한 구시대적 발상으로 스스로를 옭아매고 있었다. 요즘은 그렇지 않다고, 누가 그렇게 경계를 따지고 어렵게 길을 가냐는 말도 많이 들어왔지만 마음의 소리는 부인할 수가 없었다. 그런 글쓰기 사이트에서도 신규 작가 시절에는 밀어주기의 일환인지 포털 사이트로, 메인으로, 오늘의 작가로 그녀를 자꾸만 밀어줬다. 그것은 선순환을 일으켰고 은서는 더욱 신이 나서 밤낮으로 글을 썼다. 본업이 빛날 수 없다면 부업으로라도 인생을 다시 살아보고 싶었다. 다시 말하지만 은서는, 전업 주부가, 적성에 맞지 않았다. 야무지게 집을 가꾸고 멋들어진 요리를 해내는 주부 구단은 닿기 어려운 꿈이었다. 반면 글을 쓰다보면 꺼져가던 눈빛이 살아났고 글쓰기로 인연이 된 이들과는 점차 허물없이 속마음을 털어놓는 사이가 되어 갔다. 이런 삶이라면, 사랑하는 아이들과 남편을 위해 주부 그 이상의 어떤 역할이라도 무엇이든 잘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일이 있기 전까지는 말이다.

(다음 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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