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기억

(4편에서 이어집니다.)

집으로 돌아온 은서는 휴대전화를 손에 쥔 채 식탁 의자에 털썩 주저 앉았다. 눈에 초점이 잡히지 않았다. 조금만 정신을 차리면 될 텐데 그러고 싶지 않았다.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았다. 뭐부터 잘못된 걸까. 

괜찮다고 알려줘서 고맙다고 별일 아닐 거라고 씩씩한 척 유리를 떼어내고 집으로 뛰듯이 걸어오며, 전화기를 든 손에는 촉촉이 땀이 베어났다. 마치 뒤에서 유리가 보고 있을 것 같아 궁금해도 꾹 참고 휴대폰을 보지 않았다.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 괜찮은 척 해야할 것 같았다. 당황하거나 호들갑을 떨면 안될 것 같았다. 괜찮아, 나는 그냥 하교할 아이들 맞이할 준비를 하러 집으로 가는 것 뿐이야. 

장을 봐서 오려고 했는데 깜빡 잊었다. 그냥 집으로 내달렸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자 마자 은서는 휴대폰에 지문을 갖다 댔고, 자꾸만 인식 오류가 뜨자 자기도 모르게 아이씨- 나지막한 신음소리를 뱉으며 신경질적으로 비밀번호를 눌러 화면을 열었다. 마음이 떨리니 손도 떨렸다. 유리가 보던 기사를 찾았다. 자주가는 포털 앱을 여니 뉴스 탭의 메인에 그것이 떡하니 자리하고 있었다. 자신의 글과 아이들 사진 일부가 잘린 채로 썸네일로 박혀있었기 때문에, 찾는 것은 전혀 어렵지 않았다. 브로치에 글을 쓸 때 은서는 종종 자신의 사진첩에서 직접 찍은 사진을 담아내었고, 어딘가에서 퍼온 사진들보다 그것이 더 진실성있게 느껴지는지 독자들의 반응 역시 더 좋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이번에도 그렇게 평소처럼, 아파트에서의 생활과 아이들을 키우는 이야기니까 아이들 사진을 넣어야 겠다고 생각했던 그녀였다. 다행히 사진은 뒷모습이었다. 하지만 은서 가족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아이들이 자주 입는 옷, 헤어스타일, 무엇보다 집안 인테리어가 일부 노출되었기에 그랬다. 친정 엄마가 주신 앤틱한 무늬의 카펫이 특히 그랬다. 흔하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고, 은서의 SNS에도 많이 등장하는 거실 배경이었기에. 은서는 기사에 실린 사진을 보며 내가 왜 아까 글에 사진까지 넣었을까 후회했다. 시간도 없는데 대충 글만 쓰고 일어섰으면 됐는데 내가 왜. 

사진만이 문제는 아니었다. 글의 마지막 부분 극히 일부만 인용되어 불특정 다수의 댓글 공격을 받고 있었다. 은서네를 알아봤든 아니든, 악마의 편집으로 인해 철저히 왜곡되고 이용당한 글이든 아니든 상관 없었다. 대한민국 -또는 세계 곳곳에 퍼져있는- 의 수많은 키보드 워리어들은 '심심하던 차에 잘 걸렸다' 또는 '안그래도 층간소음 때문에 미쳐버릴 지경이었는데 이런 맘충 때문이었어? 마침 잘 만났다' 같은 댓글을 달며 눈에 핏발을 세운 채 달려들었다. 눈을 감고 상상해보니 딱 그런 느낌이었다. 사방이 불밭인 세상에서 눈이 시뻘개진 모르는 얼굴들이 자신을 향해 욕을 하며 떼거지로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부르르 몸을 떨며 눈을 떴다. 다시 눈을 감기가 두려워졌다. 시계를 보니 시간이 별로 없었다. 아이들이 오면 이런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서둘러 노트북을 열고, 브론치에 로그인 해 글을 내렸다. 그냥 내리면 안 될 것 같은데, 뭐라 해명해야 할지 머릿속이 하얬다. 아니, 공인도 아닌데 굳이 왜곡해 올린 이 글에 해명을 할 필요가 있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수없이 달린 댓글은 더이상 스크롤 할 자신이 없어 읽기를 포기했고, 매일같이 드나드는 SNS 역시 비공개 처리를 해두었다. 그래, 인터넷에서 함부로 떠들어대는 사람들 치고 냄비같지 않은 사람들이 없지. 정확하지 않은 기사 하나 읽고 부르르 끓어 올랐다가 우르르 식어버릴 사람들이었다. 은서는 이럴 때일 수록 이성을 찾아야 한다고 되뇌이며 간식을 준비하러 부엌으로 향했다.

잠시 후 집으로 온 아이들은 평소와 같이 맛있게 간식을 먹고, 조금 웃고 떠들다가 각자의 학원을 다녀왔고, 퇴근한 남편까지 모두 모인 저녁 시간의 은서의 집은 마치.. 고장난 흑백 티비와도 같았다. 오후까지의 밝음과 생기는 어디론가 사라졌고, 생각 없는 학원 선생님의 질문과 친구의 공격아닌 공격을 받았다는 첫째 아이의 조용한 흐느낌과 둘째의 짜증, 남편의 소리 없는 항의 -왜 괜히 글을 써가지고 이 사단을 만드냐는- 속에 은서의 보금자리는 소리와 화면이 따로 노는 슬로우 비디오처럼 흘러갔다. 


너무 오래 생각에 잠겼다. 은서의 장점이자 단점 중 하나는 무언가에 집중하면 곁에서 누가 뭘 하든 관계 없이 자신의 세계 속에 한참을 들어가 있는다는 것이었다. 집중의 대상이 뭐냐에 따라 좋기도, 나쁘기도 한 버릇이었다. 학창시절 그것이 공부였을 때는 꽤 좋은 성격으로 작용했지만 막상 공부에 자주 빠져들진 않았기에 효능이 자주 발휘되진 않았고, 오히려 수업 시간에 공상에 빠져 수업이 끝나는 지도 모르고 창 밖을 보고 있다가 화가 난 선생님이 눈 앞에 머리를 들이밀고 나서야 정신을 차리는 일이 허다했었다. 

바로 눈 앞에 낯설지만 친근한, 심지어 은서를 세상에서 아끼는 듯한 표정을 하고 서 있는 이 잘생긴 남자를 두고 딴 생각을 하다니. 어느새 그는 아까 은서가 잠깐 앉아있던 바로 그 바체어에 앉아 두 손으로 턱을 괴고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 나 커피 안 줘?

그가 웃는다. 그는 지혁이었다. 현세계의 지혁과 생김새도 성격도 다르지만 분명 그는 지혁이었다. 

- 아 미안. 오늘 좀 정신이 없네.

은서는 멋쩍게 웃으며 커피를 마저 내려 지혁에게 건냈다. 

- 손은 왜그래? 그거 상처난 거 아니야?

세심하다. 내가 아는 지혁은 이런 건 말 해줘야 아는데. 은서는 생각했다. 심지어 미용실을 다녀와도 잘 눈치채지 못하는 현세계의 그를 떠올리며, 은서는 괜히 기분이 좋아지는 것을 느꼈고 곧이어 자신의 감정에 스스로 놀라 혼란스러웠다. 가만히 커피를 한모금 마시는 지혁을 보자니 이 남자는 왠지 이 상황을 다 이해해줄 것 같았다. 낯선 이 곳에서 자신이 가장 기댈 수 있는 사람은 바로 이 사람임을 은서는 직감했다.

그래, 그냥 물어봐야겠어. 내가 정신이 나간 거든, 꿈이 길어지고 있는 거든 상관 없어. 궁금해서 못 참겠다고. 은서는 속으로 결심을 하고 지혁의 옆자리에 앉았다. 아일랜드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던 그들은 이제 나란히 앉아 있었고, 지혁은 오른쪽으로 몸을 돌려 한 팔로만 고개를 받친 채 은서를 바라봤다. 이렇게 온전하게 나에게 집중해주는 파트너라니. 오랫동안 잊고 있던 연애 감정 같은 무언가가 은서의 뱃속 깊은 곳에서 뽀그르르 솟아올랐다. 

- 별거 아니야, 아까 컵을 깨뜨렸어. 괜찮아.

- 괜찮은 게 아닌데? 아팠겠다. 깨진 컵은? 그냥 두지, 내가 정리하게.

- 에이 뭘, 금방 정리했어. 그나저나 지혁씨.

지혁씨라니. 여기서는 자꾸 자신도 모르게 말투가 바뀐다. 현세계에서 5살이나 많은 남편에겐 늘 '오빠'라고 했었는데, 여기 이 사람에게는 -실제로 나이도 어려 보인다- 오빠 소리가 안 나온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지혁씨라고 불렀는데 전혀 어색해 하지 않으니 다행이다. 자연스러웠어, 은서는 자기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 은서야. 

지혁이 몸을 일으켜 세우며 한 손으로 은서의 손을 감쌌다. 따뜻했다. 

- 너 혹시..

지혁이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은서의 머릿속은 생각으로 가득했다. 이곳으로 온지 한시간은 됐나?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마음이 너무 편안한 게 오히려 거북했다. 그간 드라마나 소설에서 본 공간이동 스토리를 떠올려 보면 다른 차원에서 오래 있다가 오면 현생이 몇 시간, 아니 몇 년은 훌쩍 지나 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지, 영화 인터스텔라에서도 그랬어. 우주공간에서 헤매다가 돌아오니 딸이 할머니가 되어 있었다고. 자신의 모습은 그대로인데.. 

- 은서야, 나 좀 봐봐.

- 어어, 미안. 내가 오늘 정신이 좀 없지. 생각할 게 좀 많아서.. 근데 지혁씨. 나 물어볼 게 있어.

- 응 얘기해 봐.

- 우리... 무슨 사이야? 아니, 결혼은 했나? 아님 그냥 사귀는 사이? 여기는 우리집 맞지? 내가.. 자다 깨서 그런가.. 뭐 자다 깼다고 그렇게 다 잊어버리는 게 정상은 아닌 걸 아는데.. 그런데 뭔가 많이 좀 혼란스럽고.. 이렇게 대놓고 물어보면 자기가 날 이상하게 생각할 것 같아서.. 아, 아니다. 미안. 그냥 못 들은 걸로 해줄래? 하.. 어떡하지.

은서는 묵언수행하다가 갑자기 말문이 터진 듯, 속사포처럼 질문을 쏟아냈지만 곧바로 후회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지혁의 눈빛이 흔들리다 못해 곧 터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은서를 바라보던 지혁은 잡고있던 은서의 손을 놓았다. 그리고 몸을 기울여, 은서를, 안았다. 

- 아...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흐르기 시작한 은서는 당황한 듯 몸을 살짝 떨었지만, 익숙하고 따스한 포옹에 저절로 차분해지는 것을 느꼈다. 쿵쿵거리던 맥박도 서서히 잦아들었다. 아무 말 없이 은서를 안고 토닥이던 지혁은 자세를 바꾸지 않고 말을 이었다.

- 드디어 얘기를 해주는구나. 오래.. 기다렸어 은서야. 정말 고마워. 

안고 있느라 고개가 엇갈려 있는 바람에 표정은 보지 못했지만, 지혁 역시 숨죽여 울고 있는 것을 은서는 알 수 있었다. 

- 오래 기다렸다고..? 뭘..?

은서는 천천히 포옹을 풀며 동시에 지혁의 손을 맞잡고 물었다.

- 기억 안나? 얼마 전에 사고.. 아니, 너 다치고 나서부터 지금까지 말을 안했잖아.

그렁한 눈으로 지혁은 말을 이었다.

- 한 달 전에 의식 돌아오고부터 쭉. 어제까지만 해도 말없이 글만 썼어. 나도 그랬지만 엄마랑 아빠가 워낙 힘들어하셔서... 병원에선 캐묻지 말라고 했는데, 사실 오늘은 말을 좀 꺼내보려고 했거든. 근데 니가 이렇게 얘기를 시작해서.. 하.. 정말 고마워 은서야. 

꽉 잡힌 손이 조금 저려 온다고 느껴질 때 쯤 지혁은 손을 풀고 다시 은서를 와락 껴안았다. 무슨 사고가 있었는지 한달이나 기억을 잃고, 하필 처음 여기로 -은서 기준에서는- 말문이 터진 거라니, 스토리를 이어붙여보니 무슨 영화 줄거리 같았다. '말도 안돼. 그럼 아까 방에서 내가 처음 말했을 때, 많이 놀랐겠구나 이 사람.. 그런데도 내가 놀랄까봐 아무 내색 안 하고...' 은서는 이 상황이 정말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꽉 쥔 손바닥을 손톱으로 아무리 꾹꾹 찍어봐도 아프기만 할 뿐, 꿈에서 깨어날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기쁨에 차 있는 지혁과 달리 은서는 점점 머리가 복잡해졌다. 

(다음 편으로 이어집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마녀 사냥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