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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과 같은 이름의 연인

(5편에서 이어집니다.)

가을의 끝자락 즈음의 어느 날, 미팅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은서는 예기치 못한 교통사고를 당했다. 집 앞 버스에서 막 내리는 순간 뒤에서 오토바이가 빠르게 달려왔고, 평소 조심성이 많아 유독 잘 살피고 내리던 은서가 그날따라 하필 휴대전화의 메시지를 확인하느라 방심한 사이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고. 그건 버스 안에서 목격한 사람들이 '아가씨가 폰을 보느라고 정신이 좀 팔려있었어'라고 증언하는 바람에 알게 된 사실이라고 했다. 보통 사람들은 이런 경우 애가 사고를 당하려고 그랬다는 둥, 그래서 안 하던 행동을 하면 이상한 거라는 둥 수군대기도 했다. 지혁 역시 순간 그런 생각을 안 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믿고 싶지 않았다. 은서는 -계약서에 도장이 채 마르지 않은- 이제 막 잘 나가는 작가가 된 참인데, 더 잘되려고 액땜한 거라고 생각하려 애썼다. 글 쓰는 삶을 위해 그녀가 얼마나 노력해 온 지 알기에, 지혁은 은서의 실수와 방심으로 사고가 났다고 말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건 곧 아무런 상관없는 사치스러운 생각일 뿐이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었다. 은서는 불행히도 오토바이에 받혀 붕 날아올랐다가 떨어지며 연석에 머리를 세게 부딪혔고,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도로에 피를 상당량 쏟아내어 당시의 버스정류장은 정말, 말로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로 처참했다. 이보다 더 큰 사고 현장도 수두룩 하겠지만 평소 사고가 거의 발생하지 않는 조용한 주거지역에서 일어난 일이라 그런지 사람들의 동요는 크고, 오래갔다.

은서의 첫 소설을 출간하기로 약속한 출판사 역시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날은 은서가 출간 계약 미팅을 한 날이었다. 숱하게 미끄러지던 공모전과 투고의 늪에서 드디어 탈출하는 날이었다. 돌아오는 길 지혁과 만나 근사한 음식과 함께 축하 파티라도 하려 했으나 여의치 않았다. 작지만 탄탄한 광고회사를 10년째 운영하고 있는 지혁에게 아주 중요한 미팅 제안이 들어왔고, 당연히 일정을 미루고 축하해 주려는 지혁을 은서가 뜯어말렸다. 이길 수 없다는 걸 아는 지혁은 여느 때와 같이 그녀의 말을 따랐고, 그래서 곧바로 집으로 향한 은서는 그 시간 그 자리에서 하필. 사고를 당하고 만 것이었다.


3년 전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책과 글의 세계에 빠진 은서는 조용히, 하지만 아주 활발히 자신만의 세계를 넓혀왔다. 친구들은 결혼과 육아, 직장 등 30대로서의 당연한 듯한 책임을 다해내느라 한창 바빴다. 은서와 지혁은 결혼은 하지 않았지만 단단한 연인이었다. 시대에 얽매여 굳이 살림을 합치고 싶지 않았다. 결혼이란 테두리로 그들을 묶지 않아도 둘은 충분히 사랑했고, 충분히 안정적이었다. 

은서가 지혁을 처음 만난 곳은 SNS를 통해 알게 된, 당시 한창 핫하던 독서모임을 통해서였다. 그간 직장인으로서의 삶에 치여 그런 모임은 처음이었다. 넉 달에 30만 원이라는 적지 않은 비용이 들었지만 그런 만큼 허투루 들어오는 사람은 적을 거라 생각했다. 역시나 책에 진심이거나 지금부터라도 책과 친해지려는, 대체로 묵직한 마음을 품은 이들이 모였다. 책을 좋아하지만 세상의 방해거리가 너무 많아 집중이 어려운, 그러니 약간의 강제성을 바라는 이들. 은서 역시 그들 중 하나였다.

지혁은 조금 달랐다. 은서보다 5살이나 어렸지만 성숙하고 반듯한 구석이 있었다. 나이가 무색하게 책에 대해서든, 일상에 있어서든 선배였다. 첫날 옆자리에 앉은 것을 인연으로 좀 더 많은 대화를 하게 되었고, 가장 먼저 번호를 교환하는 사이가 되었다. 장난기 어린 눈매와 진지한 입술이 대조적이었고, 그런 모습은 지혁의 이미지를 너무 어렵게도, 너무 가볍게도 보이지 않게 도와주었다. 책에 집중할 때마다 앙 다문 턱에 오돌토돌 힘이 들어가는 모양새까지 익숙해질 무렵, 그들은 연인이 되었다. 마지막 모임을 하루 앞둔 날이었다.


은서의 사고에 본인의 책임이 크다고 생각한 지혁은 심한 죄책감에 시달렸다. 매일 병원을 찾아갔고, 은서를 볼 때마다 저절로 눈물이 났으며 그녀의 무의식이 길어지면서 자신도 모르게 지쳐가는 모습에 실망하기도 했다. 딸의 입원이 길어짐에도 하루가 멀다 하고 병원을 찾는 지혁의 모습에 은서의 부모는 점점 미안함을 느꼈고, 이제 그만 찾아오라는 말을 두어 번 건넨 터였다. 결혼한 사이도 아닌데 이렇게까지.. 그들은 늘 그렇게 말하며 미안해했다. 하지만 지혁은 그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고작 도장 하나 찍는 걸로 결혼이라는 테두리에 들어가고, 그러면 이렇게 매일 찾아가는 게 당연해지고 그렇지 않으면 미안한 것이라는 상황이 이상했다. 가장 중요한 건 사람의 마음, 그리고 두 사람 사이의 관계가 아닌가 싶었다. 그래서 그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지치지 않고 은서를 찾아갔다. 

그러던 중 한 달 전쯤 마치 영화처럼 은서의 의식이 돌아왔고, 몇 가지 검사를 거쳐 드디어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하지만 은서는 말이 없었고, 표정 역시 예전 같지 않았다. 너무 오래 잠을 잔 사람처럼, 아니면 너무 오래 홀로 우주여행이라도 다녀온 사람처럼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있곤 했다. 담당 의사는 이런 경우 조금씩 말을 트도록 기다려 주는 것이 좋다고 조언했고, 지혁과 은서의 부모는 알았노라 대답했다. 그리고 온전히 그대로, 은서가 스스로 다시 돌아오길 기다리고 있던 것이었다.

거울 뒤에 숨어 있다가 지혁을 놀라게 해주는 것도 은서가 자주 하던 장난이었다. 그러니 오늘 지혁의 눈에는 은서가, 이제 진짜 돌아온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은서는.. 그렇지 않았다. 실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고, 심지어 은서 기준 '현세계'에서의 기억에 이곳에서의 삶은 무엇인지 조차 알 수가 없었다.

(다음 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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