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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은 봄, 두 세계에서의 밤

(6편에서 이어집니다)

- 나.. 여기서의 일이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아. 갑자기 내가 왜.. 여긴 어디야 대체?

이런 뜬금없는 은서의 말에도 지혁은 놀라지 않았다. 말을 하는 것만으로도 너무 기쁜 나머지. 하지만 자신이 너무 기쁨에 취해있었다는 것을 깨닫고, 은서의 어두워진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나? 내가 누군지도? 

-.. 어..

- 아.. 그럼 일단 밖으로 나가보자. 너, 너무 오래 집에만 있었어.

말을 마침과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선 지혁은, 방으로 들어가 둘의 코트를 가지고 나왔다.

- 날도 많이 풀렸어. 한 달 전 돌아올 때만 해도 추웠는데. 이 정도면 될 거야.

오랜만에 나가는 은서를 배려해서인지 지혁은, 모자를 챙겨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바깥은 봄, 새 계절이 오는 향기로 가득했다. 현세계에서 봤던 드라마 제목 '봄밤'이 떠올랐다. 남편 지혁을 처음 만난 때도 봄이었지. 첫 데이트 때 <벚꽃엔딩> 노래가 라디오에서 나왔었는데... 아직 벚꽃이 피려면 한 달은 더 있어야 할 터였지만 신세계의 지혁과 나란히 걸으며 잠시 생각에 빠져있던 은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자꾸 이렇게 예전 기억에 잠길 때가 아니었다. 빨리 상황을 파악해야 했다.

너무도 익숙해서 차이를 느끼지 못했던 것은 바로 집 밖의 모습이었다. 은서는 현세계와 같은 아파트에 살고 있었고, 밖의 모습도 비슷했다. 사람들의 모습만 낯설었다. 지혁은 은서의 어깨를 감싸고 걸었다. 무겁지 않게 살짝 팔을 얹은 것만 봐도 배려심 있는 그의 성격을 알 수 있었다.

조용히 걷던 은서는 자주 가던, 이야기 나누기 좋은 카페로 향했다. 지혁은 익숙한 듯 말없이 따랐다.


- 그래도 여긴 기억이 나나 보네? 자주 오던 곳이잖아.

- 그래? 그냥 익숙해 여긴. 좋아하는 곳이야.

따뜻한 커피를 앞에 두고, 둘은 대화를 이어갔다. 무슨 이야기든 믿어주고 밤을 새워서라도 들어줄 것 같은 지혁의 태도에 은서는 빗장을 풀었고, 지금 여기서 자신의 가장 최측근은 이 사람이라는 확신 아래 모든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하지만 지혁 당신이 현세계의 남편보다 이상형이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이 와중에 밀당을 하고 있는 자신이라니, 심각한 상황 속에도 인생은 알 수 없고 사람은 참 간사하다는 생각에 헛웃음이 났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난 지혁의 표정은 어두웠다. 오늘 본 이 사람의 표정 중에 가장 좋지 않다는 것을 은서는 알 수 있었다. 마치 영화 속 주인공처럼, 은서에게 지금 가장 간절한 것은 지혁이 자신의 말을 믿어주는 것이었다. 게다가 여기서 그녀는 작가였다. 작가라는 직업에 너무나 깊이 빠져버린 나머지 기억을 잃은 기간 내내 이런 구성의 소설을 상상한 것이라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것은 현실. 은서는 그가 그녀의 말을 믿길 바라며 좀 더 구체적으로, 자세하게 기억하는 모든 것을 설명했다.

- 그러니까 자기가 말하는 용어가.. 그곳이 '현세계'이고, 여기가 '신세계'라는 거지?

- 응, 내 기억의 기준으로는 그렇게 말이 나오네.. 지금 나한텐 여기 상황이 너무 낯설어. 당신, 그리고 내 취향으로 꾸며진 집만 빼고.

- 그래, 이해해 볼게.. 진지하게 생각 중이야. 은서 니가 이런 장난을 칠 사람은 아니니까.

그래, 여기서도 난 꽤 진중한 성격이구나, 생각하는데 지혁이 말을 이었다.

- 물론 기분 좋을 때 장난도 잘 치고 엉뚱하기도 하지만.

심각하던 분위기가 녹고 있었다. 둘은 눈을 바라보며 웃었다. 갑자기 이 상황이 너무 재미있었다. 머리로는 말도 안 되게 복잡하고 이해가 안 되는 상황이었지만 마음은 따로 움직였다. 기분 좋은 에너지가 둘을 감쌌다.

카페 마감시간인 밤 11시까지, 둘은 마치 처음 만난 연인처럼 손을 맞잡고 끊임없이 이야기를 나눴다. 이제 지구에서 이 어마어마한 비밀을 아는 사람은, 두 명이 되었다. 

그런데 여기, 지구인 건 맞겠지?


늦은 시간 집으로 돌아온 은서는 중문을 닫고, 실내용 슬리퍼로 갈아 신은 뒤 익숙한 듯 소파 끝에 걸터앉았다. 지혁과는 집 앞에서 헤어진 뒤였다. 결혼하지 않은 삶이라니, 싱글 여성의 이런 일상이 낯설지만 좋았다. 현세계에서는 아이들과 떨어져 지내본 적이 한 번도 없는 은서였다. 그런 기분에 젖어 있는데 문득 또 다른 감정이 올라왔다. 다시 혼자가 되니 느껴지는 기분. 아이들이 그리웠다. 그곳의 지혁도 걱정되었다. 엄마도, 아빠도.. 이곳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뭔가 오래된 느낌이었다. 저녁 먹기 전에 이리로 왔으니까, 그래봤자 대여섯 시간. 아이들.. 밥은 먹었으려나? 은서보다 요리를 잘하는 지혁이 아이들을 굶길 리는 없었다. 엄마는 찾지 않았을까? 막상 일이 있어 새벽에 귀가했을 때도 아이들은 은서를 찾지 않았었다. 떨어져 지내본 적이 없으니 그와 관련된 결핍도 없었다. 건강하게 자라나는 우리 아이들. 이러다 더 크면 엄마가 어디 가는 걸 더 좋아한다는데, 곧 그런 날이 오겠지..

또 생각에 잠겨 멍하니 앉아있던 은서는 다가오는 발소리에 문득 정신이 들었다. 빈집에 누구지, 깜짝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눈앞엔 심각한 표정의 지혁이 서 있었다. 현세계의 지혁, 남편이었다.

- 어디 갔다 왔어?

- 어? 나?

- 그럼 너지 누구야.

- 아.. 그게. 잠깐만 오빠, 나 잠깐 화장실 좀.

너무나 당황스러운 이 상황에 은서는 일단 혼자 있을 곳을 찾았다. 지혁 뒤로 보인 집안은 현세계의 집이었다. 이게 무슨 일이지, 내가 미치기라도 한 건가. 

샤워기를 세게 틀고 닫힌 변기 뚜껑 위에 앉았다. 정리를 해 봐야 했다. 갑자기 생각에 잠겨 있다가 이동한 것이 아까와의 공통점이었다. 또 다른 점이 있다면... 그래, 소파. 소파 끝에 앉아서 깊은 생각에 빠져 있던 것이 오늘 벌어진 두 차례 공간이동의 교집합이었다. 

- 괜찮아?

지혁이 노크를 하며 낮은 목소리로 물어왔다. 은서는 아이들부터 확인하고 싶었다. 벌떡 일어나 샤워기를 끄고 문을 열었다.

- 응, 애들은?

말과 함께 안방 문을 열었다. 두 녀석이 함께 곤히 자고 있었다. 역시 익숙한 풍경이야, 다행이다. 조용히 문을 닫고 거실로 나왔다. 

- 집을 나갔던 거야? 말도 없이, 갑자기? 그렇게 힘들면 말을 하지.. 아무 기척도 없이 사라지면 어떡해. 전화기도 두고 어디 가있던 거야?

소파에 거리를 두고 떨어져 앉아, 지혁이 물었다. 이걸 그냥 솔직히 말해야 하는지 은서는 자신이 없었다. 악마의 편집 기사 사건 이후 은서의 우울감이 심해졌고, 부쩍 소통이 줄어든 남편이었다. 당시 그 기사를 쓴 기자와 언론사에 연락해 겨우겨우 기사를 내리고, 정정보도까지 확인하고 일단락되긴 했었다. 하지만 대문짝만 하게 실려나가 여기저기 퍼다 날라진 기사와 일반인들의 글들까지 모두 지울 순 없었다. 피해보상을 받기는커녕 나 같은 일반인이 뭘..이라고 생각하며 더 이상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정정기사는 어딘지도 모를 페이지에 자그마하게,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미안해요'라는 표정으로 쭈그린 채 놓여 있었다.

지혁은 허리를 세우고 미동도 없이 앉아 있었다. 평소 늘 소파에 파묻히다시피 누워있는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처음 있는 일이었기에 몇 시간의 소동쯤은 그냥 넘어갈 법도 했지만 오히려 반대였다. 소심한 은서가 이렇게 과감하게 행동하다니 이상했다. 심지어 나가고 들어오는 소리도 듣지 못했는데, 증발한 듯 사라졌던 은서가, 역시 연기처럼 나타난 것이 너무나 의아했다. 도어락이 고장 났나.

- 집을 나간 게 아니고.. 여기 잠깐 앉아 있었는데.. 다녀와 보니 이 시간이네.

- 뭐라고? 무슨 말이야 대체.

- 그러니까, 여기에 있었는데 저절로 다른 곳에 다녀온 것 같아. 이상해 나도. 꿈인가, 내가 집에 없었어? 아예 안 보였어?

-... 은서야. 

은서가 너무 진지하게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다고 생각한 지혁은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요즘 거의 집에만 있더니, 진짜 상태가 안 좋아진 걸까. 머리가 아파왔다. 심각하지만 멍한 은서의 표정을 보니 더 얘기해 봐야 좋을 게 없을 것 같았다.

- 내일 다시 얘기하자. 늦었다, 자자.

한참을 말없이 바닥을 내려다보던 지혁은 무겁게 일어나 아이들 방으로 향했고, 은서는 엄마를 찾다가 둘이 엉켜 잠들어 버린 침실로 힘없이 걸어갔다.

(다음 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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