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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야 느껴본 워케이션의 참맛

아침 9시부터 같은 자리에 앉아있다. 집에서라면 가능할까, 생각해 본다. 물론 화장실은 갔다. 앉아만 있는다고 생리현상까지 일어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이 자리에서 커피도 마셨고, 샌드위치도 먹었고, 사람냄새와 남들의 커피 향까지도 들이마셨다. 배가 부르다. 흔히들 말하는 점심시간을 넘기기 시작하며 사람들이 많아진다. 아침에 들어올 때만 해도 드넓은 2층 홀엔 포함 테이블만 있었다. 부지런히 하루를 여는 사람들.



여긴 제천이다. 서울에서 7시경 출발한 것 같다. 정확히 시계를 보지 않았지만 대략 그랬다. 자고 일어나 보니 온 세상이 하얬다. 2월 말이나 되어서야 제법 눈다운 눈이 내렸다. 예전엔 4월에도 눈을 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기억이 맞나 모르겠다. 정신없이 사는 동안 시간이 너무 흘러버렸고, 내가 꽉 찬 40년을 살았다고 생일이, 달력이 말해주었다. 말도 안 된다고, 그럴 리 없다고 손사래 친 게 지난 주다. 이제 어디 가서 30대라고 우길 일은 없어졌다.


워케이션이라는 것이 있다. 재택근무자들이 집이 아닌 여행지에서도 일을 할 수 있게 해주는 회사의 배려 같은 거다. 용어도 참 생소하지만 작년에 처음 알았다. 내가 일하는 회사에도 이런 제도가 생겼고, 사실 처음엔 굳이 이런 게 필요한가도 싶었다. 어디서든 일만 잘하면 되는 거 아닌가 싶었다. 일을 시작할 때부터 '알아서 근무' 형태였기에 

 근무지가 꼭 집이어야 한다는 생각은 안 해봤던 것이었다. 재택근무(務) 그 말 자체가 재택, 즉 '집에서' 회사의 업무를 보는 일을 의미한다. 나 같은 경우 사무실이 곧 내 컴퓨터가 있는 곳이니, 그냥 노트북 하나 들고 어딜 가든 일만 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말이다.


하긴 사무실에서 일하는 것이 본래의 형태이고 가끔 재택근무를 하거나, 일정 기간 그렇게 하는 직장인이라면 이런 제약이 필요하기도 하겠다 싶다. 나 같은 소심 쫄보는 어디서 일하든 굉장히 열심히 한다. 정말이다. 해야 할 일이 있는데 미루고 놀거나 땡땡이를 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대표님과 친해서만이 아니다. 어차피 다 드러나는 일, 남에게 싫은 소리 듣거나 미루어 놓고 불안해하기가 싫은 것뿐이다.



사실 내가 집에서 일하는 걸 아는 몇몇 지인들은 그동안 꾸준히, 카페로 나와서 '놀면서' 일하라고 은근히 장난 삼아 조언 아닌 조언을 하는 이들도 있었다. 일이 아주 적었거나 내가 멀티가 가능한 사람이었거나 배포가 유달리 큰 사람이었다면 그럴 수도 있었을까. 결론적으로 나는 그러지 못했다. 일에 집중해야 할 때는 가사 있는 노래도 듣지 못하는 편이었고, 급한 일을 다 마치지 못하고선 수다가 떨어지지 않는 사람이었다. 외국에서 언니가 3년 만에 왔을 때도 나의 근무시간은 철저했다. 결국 지인들도 날 파악했고, 더 이상 업무시간에 유혹하는 일은 없었다. 솔직히 아주 솔직히 조금은 서운하기도 했지만 그것 또한 그들의 배려이니 아쉬워하지 않기로 했다.


여하튼 현대 문물에 빠른 나의 사랑스러운 대표님은 워케이션이라는 멋진 제도를 만들어 주셨고, 예전의 캠핑장 근무에 이어 오늘은 지방 카페 근무를 마치고 이렇게 글을 쓴다. 집에 있는 나의 데스크탑이 일하기에는 훨씬 편해서 여태껏 카페 근무를 피해 왔는데, (집 근처 카페에서 일하는 것은 자유다. 워케이션에 포함되지 않는다), 손톱을 짧게 자르니 노트북 키보드도 사용이 이렇게 편안한 것이었다니. 이제껏 화면이 작아서, 모니터가 한 개라서 불편한 거라 여겨 왔는데 그게 아니고 손톱 때문이었다니 조금 황당하긴 하지만, 긍정적으로 해석하기로 했다. 내가 이렇게 오래 한 곳에 앉아서 집중해서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사람이란 것을 확인했으니.


재택근무의 장점은 첫째로도 둘째로도 아주 편하다는 데에 있다. 출근 10분 전에 일어나도 전혀 티가 나지 않을 수 있으며(나는 아이들 때문에 그런 적이 한 번도 없..지는 않고 두어 번 있다.) 상사의 눈치나 동료와의 관계에 애먹을 필요가 없다. 피곤한 아침 옷을 갈아입거나 화장을 할 필요도 없으며, 심각하게 힘들다면 씻지 않아도 아무도 모른다. 뭐 이런 건 코로나 때 재택 한 번 안 해본 사람은 없을 거기에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단점은? 회사 사람들에게서는 자유로울지 모르나 집안의 사람들에게서는 자유로울 수 없다. 특히 아이들이 방학이라면. 일찌감치 일어나 아이들에게 할 일을 부여하고, 나의 패턴에 아이들이 맞춰만 준다면 너무나 완벽한 하루가 되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일하는 동안 너희가 스스로 할 수 있는 공부를 마쳐놓지 못하겠다면... 그냥 놀아라! 차라리 내가 일할 때 본인들 좋아하는 놀이에 집중하는 것(대개 TV라는 것이 조금 안타깝다)이 너희도 좋고 나도 좋고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이라는 결론에 다다랐다.


방학 막바지, 평일에 이렇게 놀러 오느라 워케이션을 해보고 남는 시간엔 이렇게 끄적일 수 있었던 건, 그러니까 시간이 남을 수 있었던 건. 남편이 아이들을 데리고 등산을 갔기 때문이다. 세상 고마운 남편. 겉으로 나는 놀러 와서도 일하는 불쌍한 엄마일 수 있지만, 현실적으로도 오전 3시간 내내 일만 하긴 했지만, 집을 나와 눈 쌓인 낯선 동네의 모습을 통유리로 바라보며 일하는 이 시간이 얼마나 행복했는지는 아무도 모를 거다.


오래 앉아있으려니 조금 미안한 마음에(워낙 큰 카페 -스타벅스- 라서 자리가 텅텅 비어있긴 하지만) 나가는 길에 커피를 한잔 더 사서 나가려 한다. 아깐 아침이었고 이젠 점심 때니까, 오후엔 아이스 아메리카노지!


나가서 아이들과 남편을 만나면 조금은 피곤한 눈으로, 엄마 이렇게 일하고 왔어- 라는 표정으로, 하지만 반갑고 기쁜 얼굴로 다가가야지. 아무렇지 않게 맞이할 그들을 생각하며 글을 마무리해 본다. 아, 마침 전화가 온다. 그럼 그렇지, 양반은 못  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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