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모전 지원이 완료되었습니다.’
그간 공들여온 작품들을 묶어, 성격이 잘 맞아 보이는 공모전에 포트폴리오를 보냈다. 파일 용량이 제법 크다 보니 압축까지 해서 보냈는데, 제목은 ‘나우.zip’이었다. 메일을 받은 주최 측에서 이 압축 파일을 풀어보기 위해 더블 클릭으로 문을 열 것이다. 그럼 그 안에 오밀조밀 모여있는 내 작품들이 하나씩 그들의 눈앞에 등장한다. 공모전의 성격에 맞는다 판단되면 회신이 올 것이고, 아니면 나의 정성이 가득 들어간 이 ‘나우.zip’은 무심히 휴지통으로 직행할 터. 디즈니 성 부럽지 않게 아기자기한 나의 세계가, 누군가 무미건조한 손가락 몇 번의 움직임으로 버려질 것이라 생각하니, 이건 좀 마음이 쓰라린 일이다. 그 안에 담긴 건 오롯이 나의 이야기로 가득 찬 내 세계다. 나의 이름을 딴, 현실엔 없는 ‘나의 집.’ 그 속에서 서로 부대끼며 살아 숨 쉬는 작품들이야말로, 함께 살아가는 현실의 우리 모습과 다를 게 없다.
요즘 진짜 ‘집’이 갖고 싶다는 생각이 부쩍 들었다. 그래서 돈도 없는 주제에 검색 엔진을 통해 매물을 찾아봤다. 집주인이나 부동산 중개인이 올린 집 사진을 보는 것만으로도 이미 거기서 살아가는 상상 속 나에게 푹 빠져든다. 벽지 색깔에 조명 위치까지 정하다 보면 시간 가는 줄도 모른다. 그러다 다시 현실로 돌아오면 실상은 냉혹하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건 8평짜리 오피스텔, 아니면 ‘주택거지’라는 딱지를 떼기 어려운 빌라, 말이 좋아 경기도, 수도권이지. 서울 출퇴근 길만 왕복 4시간은 족히 걸릴 변두리 구축 아파트 정도다. 그러다 혹시나 하고 마음에 드는 집을 찾아도 결론은 똑같다.
바로 ‘집값.’너무 비싸서 접근조차 못 하거나 살 수 있을 만한 가격이라면 후에 시세차익을 보지 못하거나 하는 철저히 자본주의 시장에 입각한 사설들이 들려왔다. ‘이 동네가 조용하고 예뻐서, 층간소음이 싫어서, 내 마음대로 꾸밀 나만의 공간이 필요해서’와 같은 이유는 세상 물정 모르는 철없는 소리로 치부된다. 내 나이가 곧 사십인데.
유튜브 알고리즘은 내 고민에 염장까지 지른다.
‘재개발 호재, 마지막 기회, 1억만 있다면 투자하라 2030!’‘지금 빌라 사면 끝장납니다!’
썸네일 속 자극적인 문구들이 시나브로 나를 투기판으로 끌어들인다. 어떤 노선이 개통되면 강남, 용산, 여의도를 50분 컷에 찍을 수 있다는 계산, 한강 라인을 따라 노후 주택 밀집 지역에 얽힌 미래 가치, 대치동 학원가와의 접근성까지. 몇 번의 검색만으로 불어나는 정보량에 그간 이런 분야에 관심도 두지 않고 혼자만 다른 세상에 살아왔나 싶은 착각이 들었다. 어쩌면 대한민국이 아니라 대한제국에 머무르고 있는걸지도. 그렇게 쏟아지는 ‘투자 조언’ 앞에서, 나는 어느새 스스로를 은밀한 패배자로 낙인찍는다.
어떤 영상에선 월세가 아까워 빌라를 매입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들은 대출도 없이 낡은 빌라를 사서 자기 개성대로 꾸미며 살고, 그것만으로도 만족스럽다고 말한다. 그런데 댓글은 가차 없다.
“지금이야 좋지. 애 낳고 아파트 가려면 빌라 안 팔려요.”
“평생 주택거지로 살 거면 빌라에 눌러앉으세요.”
누군가의 삶의 만족이 그저 시대에 뒤처지는 비웃음거리로 치부된다. 이곳 서울에서는 브랜드 아파트, 대단지의 24평 이상에 들어가야만 인간 승리의 딱지를 받는다. (거기가 강남, 서초, 송파, 용산이면 신급 대우를 받는다.) 집이란 건 단순히 내 몸과 마음이 편안히 머무는 아늑한 공간이라고 생각해 왔는데, 2025년의 집은 투자 상품이자 계급의 상징일 뿐이다. 반지하는 ‘인생의 실패,’ 빌라는 ‘낙오자의 선택’으로 불린다. 임대주택에 사는 아이는 차별을 당하고, 부모가 이룬 집의 형태가 아이의 자존심까지 좌지우지한다. 결국 집의 외피가 사람의 가치를 결정하는 시대가 되어버렸다.
나는 어릴 적 반지하에서 살았다. 성남의 신혼집을 전세로 돌리고 논, 밭뿐이던 서울의 가장 변두리 마을에서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려던 부모님이 선택할 수 있었던 최선의 보금자리가 그곳이었다. 지금도 반지하는 열악하지만, 그땐 더욱 그랬다. 화장실이 집 밖에 있어 겨울이면 너무 추워서, 엄마가 부엌에서 나를 씻겨주곤 했다. 그 기억만 빼면 어린 나는 그 집에서 느낄 불편한 점이 없었다. 옆집엔 공부 잘하는 중학생, 고등학생 언니들이 살았고, 언니들은 나와 곧잘 놀아주었다. 틈만 나면 그 집에 맨발로 놀러가 언니의 책상에 함께 앉아 그림을 그리며 놀았는데 곧 엄마가 공부 방해해서 미안하다며 나를 업고 집으로 돌아왔다. 지금 생각해보면 심성이 착한 소녀들이 아닌가. 시험 기간이라 짜증이 났을 법도 한데 나의 불시 방문에 한 번도 인상을 쓰는걸 본 적이 없었다. 심지어는 서랍에 있는 사탕까지 내어줬다. 나 같으면 몰래 딱밤을 먹였을텐데. 봄이 오면 주인집 할머니가 심은 철쭉이 마당을 가득 메웠다. 할머니는 어린이집에 처음 가는 나를 세워두고 사진을 찍어주셨고, 집에 돌아오면 흔들의자에 앉혀 동화책을 읽어주셨다. 그림처럼 그려지는 그 시절의 나는 비록 땅을 파고 들어가 살았지만 드넓은 양지에서 더없이 많은 사랑을 먹고 튼튼하게 뿌리내리며 자라났노라 말할 수 있다. 내 방엔 없는 장난감이 없었고, 나를 향하는 주변 사람들의 시선도 말투도 모두 따뜻했다. 나의 삶은 풍족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더 넓은 다세대 주택으로 이사를 갔고, 동생이 태어났다. 집은 더 활기찼다. 옆집 언니와는 한 살 터울이라 수시로 서로의 집을 드나들며 놀았고, 한 층 위에 사는 주인집 아주머니가 아기를 낳았을 때는 매일같이 아기를 보러 갔다가 저녁으로 카레까지 얻어먹고 돌아오기도 했다. 지하에 새로 이사 온 남매가 떡을 들고 인사 왔던 날엔 곧장 그들을 내 방으로 초대해 신상 장난감을 함께 가지고 놀았다. 그때의 그 집엔 계급도 편견도 없었다. 오직 또래 아이들의 재잘대는 웃음소리만 가득했다.
지금은 어떤가. 집이란 것은 보금자리의 개념을 넘어 ‘증명하는 곳’이 되었고 단기간에 수억의 차익을 얻을 수 있는 부의 사다리가 되었다. ‘사는 곳’이 아니라 ‘사야 하는 것’으로 변모한지 오래고 반지하와 빌라는 패자부활전의 무대쯤으로 취급된다.
내가 아이들을 가르치던 시절 참 예뻐하던 아이가 있었다. 가진 결이 어여쁜 순진무구한 소년이었는데, 엄마에게도 어찌나 사랑스러운 아이던지 저런 아들을 낳을 수만 있다면 당장에 내일이라도 결혼이 하고 싶을 지경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은 주변 신축 아파트에 사는 아이들이 그 아이들 암벽등반가라고 놀리는 걸 듣게 되었다. 왜 그러냐 물으니 언덕에 있는 빌라촌에 살아서 그렇다는 아이들의 해맑은 대답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빌라에 사는 애들은 못살아서 매일 암벽을 탄다고. 열 살이나 겨우 먹은 아이들이 그 말의 무게를 알고 그렇게 하하호호 떠들었을거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아니 않고싶다. 하지만 그 악의 없는 순수함에 지금도 골이 띵하고 아픈건 사실이다.
집의 외피가 아이의 사회적 지위까지 결정한다는 사실은 참 씁쓸하다. 그럴 때마다 나는 속으로 되묻는다. 집은 그냥 사는 곳 아니었나? 내가 좋아하는 동네에서, 감당할 수 있는 값을 찾아, 편히 쉴 수 있는 곳을 택하는 게 당연한 권리 아닌가? 그런데도 지금의 사회에서 집은 점점 더 무겁고 차갑게만 다가온다. 마치 인생의 승패를 판가름하는 시험지처럼, 어느 칸에 체크했느냐에 따라 점수가 매겨지는 듯하다.
다시 압축파일을 떠올린다. 작은 아이콘 안에 오래된 사진, 쓰다 만 소설, 포트폴리오가 차곡차곡 들어 있듯이, 집도 그렇다. 외형이나 가격표로는 결코 설명할 수 없는 삶의 조각들이 그 안에 담겨 있다. 누군가에게 집은 ‘투자 자산’일 수 있겠지만, 나에게 집은 다정한 이의 목소리, 밥 짓는 냄새, 맥주 한 잔에 섞여든 고민상담 같은 파일들이 저장된 ‘.zip’ 폴더다. 열면 사연이 통통 튀어나오고, 닫으면 작은 아이콘 하나로 고요해진다. 어쩌면 집값이란건 그 압축률을 따져보려는 헛된 계산일지 모른다. 중요한 건 크기가 아니라, 그 안에 무엇이 담겼느냐가 아닐까. 아직 세상 물정 모르는, 내일모레면 마흔인 나에게 집이란 결코 수익률이 아니라, 삶을 압축해 담아둔 가장 소중한 폴더다. 더블클릭할 때마다 흘러나오는 건 돈의 냄새가 아니라 내가 축적해온 온기이길 바란다. 가끔은 원치 않는 것들이 나올 때도 있다. 새벽부터 아랫집에서 올라오는 고등어 굽는 냄새, 늦은 밤 이웃집 강아지의 컹컹 짖는 소리, 사이렌도 한 수 접을 아기의 울음소리와 발망치 소리가 팝업창처럼 나타나기도 하지만 이 또한 삶의 찬란한 소음이 아니겠는가. 결국 집이라는 건, ‘삭제’가 아니라 ‘저장’ 버튼을 누르게 만드는 가장 따뜻한 압축파일이란 이 믿음을 나는 당분간 고수하려고 한다. 언젠가는 운명처럼 나타날 나의 ‘zip’이 나타날 때까지.
(고로 그렇게 또 멀어지는 내 집 마련의 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