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회사를 다니던 20대 중반에사무실에 자주들락거리던 협력업체 직원이있었다.20대 후반의동원 씨. 동원 씨는 볼 때마다 식사 한번 하자고끈적끈적하게 데이트신청을 해왔고 그에게전혀 관심이 없던 나는 "네, 언제 한번 같이해요."라는 형식적인 대답을되풀이하며기약 없는 약속만수십 번을 했다.자주 봐야 하는 협력업체 직원이기도 했지만직원들의 눈과 귀가 열린 곳에서 데이트신청을 받았기때문에냉정하게 거절하기도 힘든 상황이었다.
소문에 의하면 그는여러 명의 여자와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며 양다리, 세 다리도불사하는자유연애주의자였다. 그래서인지지켜지지 않을약속을하면서도 죄책감 따윈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동원 씨가작정을한 듯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다가와 물었다.
"오늘 시간 있으세요? 퇴근하고같이 밥 먹죠."
"저...... 오늘 친구랑 약속이......"
"여잡니까?"
"네, 고등학교 동창이요."
"그럼 그분이랑 같이 만나요. 제가 맛있는 거 사드릴게요."
"세명인 데요?"
"그럼 제 친구들도 데리고 나갈게요. 같이 먹어요.
그럼 이따 봬요."
솔로였던동창들은 흔쾌히 받아들였고우린신포동의 한 카페에서 만남을가졌다. 비슷한 색깔의 양복을 입은 그들은 지극히 무난하고 평범해서 한두 번 봐서는 각인되지 않는 모습들을 하고 있었다.
"다들 뭐 드시고 싶은 거 있으세요?"
"저는 아무거나. "
"저도......"
"저도......"
"그럼 오늘은 선희 씨가 먹고 싶다는 걸로 하죠. 선희 씨는 뭐 드시고 싶으세요?"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정말로 그 순간 먹고 싶은 메뉴를 말해버렸다.
"꽃게탕이요."
"아..... 꽃게탕. 다들 괜찮으세요?"
"...... 네"
"네."
"좋아요."
처음 보는 남자들 앞에서 하필 먹기 힘든 꽃게탕을 선택했다니. 점심에쫄면을 먹어서 그런지 잔뜩 허기가 져 있던 나는오렌지빛 꽃게알이 국물 속에 여기저기 뚝뚝 떨어져 있는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꽃게탕을 보며 식욕까지 같이 끓어올랐다.결국 누구도 의식하지 않고 입안 가득 고인 침을 꿀꺽꿀꺽 삼켜가며조각 나 있는 큼직한암케의 일부를 앞접시에 건져놓고 맹렬히 발라먹기 시작했다.다리까지뚝잘라 빨아먹고 국물에 밥까지 말아서맛있게 식사를 하고 있는데 옆에 앉아있던 동창이한쪽 손으로 입을 가리고 내가 있는 방향으로 상체를 기울이며 속삭였다.
"야! 저 사람 이제 너한테 연락 안 하겠다."
"왜?"
"말도 없이 꽃게만 게걸스럽게 먹는 여자를 누가 좋아하냐? 정 다 떨어졌을걸?"
"내가 좀 심했나?"
"그래, 너 좀 심했어. "
이젠 더 이상 동원 씨가 치근덕 거리지 않을 거라는 생각을 하니 시원하기도 했지만 이상하게도 섭섭함이 국에 녹아든 조미료만큼살짝스며들었다.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동원 씨는 그 후로도 지속적으로 나를 찾아와 밥을 먹자, 술을 마시자,며 질척거렸고 나는최대한 예의 있게 관심이 없다는 표현을했다.
"저는 지금 누굴 만날 생각이 없어요."
"제가 요즘 좀 바빠요."
유난히도 눈이 많이 오던 겨울, 구정을 며칠 앞둔 어느 날이었다.
"선희 씨, 한과 좋아하세요?"
"아뇨, 저는그다지......"
"부모님은 좋아하실 거 아니에요. 그쳐?"
"네...... 뭐......"
"그럼 이번주 일요일에 뭐 하세요?
제 친구지인이 한과공장을 하는데요, 제가 댁으로 젤 비싼 걸로 가져다 드릴게요."
"아니에요. 괜찮아요."
"사양 마세요. 이미 선희 씨 드릴 거주문해 놨어요.
선희 씨 집이 주안 기계공고 맞은편 맞으시죠?"
"아니 그걸 어떻게......"
"전에 식사자리에서 얘기했잖아요.
일요일에 도착해서 전화할 테니 나오세요."
동원 씨는 내 거절의사를냉큼 잘라 삼키고 마음대로 약속을 잡아버렸다.
우리 집은 며칠 전에집을 나간강아지 깜둥이 때문에식구들 얼굴에수심이 가득했고거센추위에 헤매고 다닐 깜둥이를 생각하니나 역시그 무엇도손에 잡히질 않았다. 생각 끝에 전단지라도 만들어 동네 벽에붙이기로 결심한 나는 전단지 몇십 장을인쇄해밖으로 들고나갔다.
강아지 깜둥이를 찾습니다.
잡종이고 머리서부터 몸까지 온통 검은색입니다.
연락 주시면 사례하겠습니다.
전단지속 깜둥이의 사진을 보고 있으려니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추위에 덜덜 떨며 전단지 몇 장을 붙이고 나니 온몸이 감각이 없을 만큼 얼어버렸다. 희뿌연 눈발이 시야를 가려 아른거렸고살이 노출된 부분은 살색을 잃어버린 붉은색이 되었다. 무릎 나온운동복바지에는아침에 먹다 흘린 김치국물까지 묻어 있었고오직방한만을 위해 만들어진 것 같은점퍼는 멋이라고는 쌀알 반쪽만큼도 없었다. 거기다 콧물까지훌쩍거리고있는모습은내가 봐도 꼬질꼬질했다. 얼굴이라도 가려볼까 해서 점퍼에 달린 싸구려 인조털이 붙어있는 모자를 함빡 뒤집어쓰고 나니 꼴은 더 우스워졌다.
하필 그때 동원 씨한테 전화가 왔다.
"선희 씨, 집 앞이에요. 나오세요."
"저 지금 밖인데요. 어디세요?"
조수석에 친구를 태우고 온 동원 씨는 내 모습을 보더니 멈칫하는 듯했다.
"저...... 강아지가 집을 나가서전단지 붙이고 있었어요."말을 하고 있는 중에 콧물은 인중을 타고 흘러내려왔고한 번에 말끔하게 닦이지 않는 콧물을 여러 번소매로 훑어가며훌쩍거렸다. 소매자락에콧물이 허옇게 얼어 버렸다.
"아...... 강아지를 엄청 사랑하셨나 봐요.
자, 이거받으세요."
동원 씨는 한과를 주고 나서는이렇다 저렇다 말도 없이 꾸벅 인사를 하고 차에 올라탔다.멀어져 가는 차를 보고 있는데 조수석에 타고 있던 친구의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야!! 저게 뭐가 이쁘냐?"
그 후로동원 씨의 행동과 눈빛은 달라졌다. 더 이상 사적인 얘긴 묻지 않았고데이트 신청도 하지 않았다.순한 시골총각 같은 모습은 간데없고 한파를 몰고 다니는 사람처럼 차갑게 변해버렸다. 얼마 후에그가부평역에있는건축사사무소 미스유에게 추파를 던지고 있다는 소식이들려왔다.
그날 전단지를 붙이고 있던 내 모습이 동원씨를 단념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긴 했지만 그런 방법은싫었다.
뒤이어동원 씨와 미스유가 사귄다는 소문이 들렸고 그 소식에 괜스레 부아가 치밀었다.그날 나는 어둑해진 퇴근길, 아무도 없는 골목에서 두툼한 재킷에 얼굴을 묻고들리지 않는 목소리로소심하게화풀이를 하며 뇌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