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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선희 Jun 29. 2023

남자를 단념하게 만드는 방법

"선희 씨, 언제 식사나 같이 한번 하실래요?"

건축회사를 다니던 20대 중반에 사무실에 자주 들락거리던 협력업체 직원이 있었다. 20대 후반의 동원 씨. 동원 씨볼 때마다 식사 한번 하자고 끈적끈적하게 데이트신청을 해왔에게 전혀 관심이 없던 나는 "네, 언제 한번 같이해요." 라는 형식적인 대답을 되풀이하며 기약 없는 약속만 수십 번을 했다. 자주 봐야 하는 협력업체 직원이기도 했지만 직원들의 눈과 귀가 열린 곳에서 데이트신청을 받았기 때문에 냉정하게 거절하기도 힘든 상황이었다. 


소문에 의하면 그는 여러 명의 여자와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며 양다리, 세 다리도 불사하는 자유연애주의자였. 그래서인지 지켜지지 않을 약속 하면서도 죄책감 따윈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동원 씨가 작정을 한 듯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다가와 물었다.

"오늘 시간 있으세요? 퇴근하고 같이 밥 먹죠."

"...... 오늘 친구랑 약속이......"

"여잡니까?"

"네, 고등학교 동창이요."

"그럼 그분이랑 같이 만나요. 제가 맛있는 거 사드릴게요."

" 명인 데요?"

"그럼 제 친구들도 데리고 나갈게요. 같이 먹어요.

그럼 이따 봬요."


솔로였던 동창들은 흔쾌히 받아들였고 우린 신포동의 한 카페에서 만남을 가졌다. 비슷한 색깔의 양복을 입은 그들지극히 무난하고 평범해서 한두 번 봐서는 각인되지 않는 모습들을 하고 있었다.

"다들 뭐 드시고 싶은 거 있으세요?"

"저는 아무거나. "

"저도......"

"저도......"

"그럼 오늘은 선희 씨가 먹고 싶다는 걸로 하죠. 선희 씨는 뭐 드시고 싶으세요?"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정말로 그 순간 먹고 싶은 메뉴를 말해버렸다.

"꽃게탕이요."

"아..... 꽃게탕. 다들 괜찮으세요?"

"...... 네"

"네."

"좋아요."


처음 보는 남자들 앞에서 하필 먹기 힘든 꽃게탕을 선택했다니. 점심에 면을 먹어서 그런지 잔뜩 허기가 져 있던 나는 오렌지빛 꽃게알이 국물 속에 여기저기 뚝뚝 떨어져 있는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꽃게탕을 보며 식욕까지 같이 끓어올랐다. 결국 누구도 의식하지 않고 입안 가득 고인 침을 꿀꺽꿀꺽 삼켜가며 조각 나 있는 큼직한 암케의 일부를 앞접시에 건져놓고 맹렬히 발라먹기 시작했다. 다리까지 뚝잘라 빨아먹고 국물에 밥까지 말아서 맛있게 식사를 하고 있는데 옆에 앉아있던 동창이 한쪽 손으로 입을 가리고 내가 있는 방향으로 상체를 기울이며 속삭였다.

"야!  사람 이제 너한테 연락 안 하겠다."

"왜?"

"말도 없이 꽃게만 게걸스럽게 먹는 여자를 누가 좋아하냐? 정 다 떨어졌을걸?"

"내가 좀 심했나?"

"그래, 너 좀 심했어. "

이젠 더 이상 동원 씨가 근덕 거리지 않을 거라는 생각을 하니 시원하기도 했지만 이상하게도 섭섭함이 국에 녹아든 조미료만큼 살짝 스며들었다.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동원 씨는 그 후로도 지속적으로 나를 찾아와 밥을 먹자, 술을 마시자,며 질척거렸고 나는 최대한 예의 있게 관심이 없다는 표현을 했다.

"저는 지금 누굴 만날 생각이 없어요."

"제가 요즘 좀 바빠요."


유난히도 눈이 많이 오던 겨울, 구정을 며칠 앞둔 어느 날이었다.

"선희 씨, 한과 좋아하세요?"

"아뇨, 저는 그다지......"

"부모님은 좋아하실 거 아니에요. 그쳐?"

"네...... 뭐......"

"그럼 이번주 일요일에 뭐 하세요?

제 친구 지인이 한과공장을 하는데요, 제가 댁으로 젤 비싼 걸로 가져다 드릴게요."

"아니에요. 괜찮아요."

"사양 마세요. 이미 선희 씨 드릴  주문해 놨어요.

선희 씨 집이 주안 기계공고 맞은편 맞으시죠?"

"아니 그걸 어떻게......"

"전에 식사자리에서 얘기했잖아요.

일요일에 도착해서 전화할 테니 나오세요."

동원 씨는 내 거절의사를 냉큼 잘라 삼키고 마음대로 약속을 잡아버렸다.


우리 집은 며칠 전에 집을 나간 강아지 깜둥이 때문에 식구들 얼굴에 수심 가득했 거센 추위에 헤매고 다닐 깜둥이를 생각하니 나 역시 그 무엇도 손에 잡히질 않았다. 생각 끝에 전단지라도 만들어 동네 벽에 붙이기로 결심한 나는 전단지 몇십 장을 인쇄해 밖으로 들고나갔다.


강아지 깜둥이를 찾습니다.

잡종이고 머리서부터 몸까지 온통 검은색입니다.

연락 주시면 사례하겠습니다.


전단지속 깜둥이의 사진을 보고 있으려니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추위에 덜덜 떨며 전단지 몇 장을 붙이고 나니 온몸이 감각이 없을 만큼 얼어버렸다. 희뿌연 눈발이 시야를 가려 아른거렸 살이 노출된 부분은 살색을 잃어버린 붉은색이 되었다. 무릎 나 운동복바지에는 아침에 먹다 흘린 김치국물까지 묻어 있었고 오직 방한만 위해 만들어진 것 같은 점퍼는 멋이라고는 쌀알 반쪽만큼도 없었다. 거기다 콧물까지 훌쩍거리고 있는 모습은 내가 봐도 꼬질꼬질했다. 얼굴이라도 가려볼까 해서 점퍼에 달린 싸구려 인조털이 붙어있는 모자를 함빡 뒤집어쓰고 나니 꼴은 더 우스워졌다.


하필 그때 동원 씨한테 전화가 왔다.

"선희 씨, 집 앞이에요. 나오세요."

"저 지금 밖인데요. 어디세요?"

조수석에 친구를 태우고 온 동원 씨는 내 모습을 보더니 멈칫하는 듯했다.

"...... 강아지가 집을 나가서 전단지 붙이고 있었어요." 말을 하고 있는 중에 콧물은 인중을 타고 흘러내려왔고 한 번에 말끔하게 닦이지 않는 콧물을 여러 번 소매로 훑어가며 훌쩍거렸다. 소매자락에 콧물이 허옇게 얼어 버렸다.

"...... 강아지를 엄청 사랑하셨나 봐요.

자, 이거 받으세요."

동원 씨 한과를 주고 나서는 이렇다 저렇다 말도 없이 꾸벅 인사를 하고 차에 올라탔다. 멀어져 가는 차를 보고 있는데 조수석에 타고 있던 친구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야!!  저게 뭐가 이쁘냐?"


후로 동원 씨의 행동과 눈빛은 달라졌다. 더 이상 사적인 얘긴 묻지 않았고 데이트 신청도 하지 않았다. 순한 시골총각 같은 모습은 간데없고 한파를 몰고 다니는 사람처럼 차갑변해버렸다. 얼마 후  부평역에 있는 건축사사무소 미스유에게 추파를 던지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날 전단지를 붙이고 있던 내 모습이 동원 씨를 단념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긴 했지만 그런 방법은 싫었다.

뒤이어 동원 씨와 미스유가 사귄다는 소문이 들렸고 그 소식에 괜스레 부아가 치밀었다. 그날 나는 어둑해진 퇴근길, 아무도 없는 골목에서 두툼한 재킷에 얼굴을 묻고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소심하게 화풀이를 하며 뇌까렸다.

"누구나 집에 있을 땐 다 그렇게 하고 다니거든요.

너도 그날 코트에다 청바지 입은 거 이상했다고. 거기다 검정구두는 최악이었어.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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