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운 조명 아래 어스름 속에서 점점선명해지는 남자의 뒷모습, 무릎아래까지 내려오는 베이지색 긴 코트를 걸치고고개를 반쯤 숙인 실루엣을 보는 순간목구멍에서 반사적인 소리가 터져 나왔다.꺄악......
그가 객석을 향해 몸을 돌리는 순간 흘러나오는 전주소리는공간을 터뜨려버릴 것 같이 크고 웅장했다.
옆반 희진이는 또래 고2 여학생들에 비해 성숙했고 특이하다는 소문이 무성한 비범한 친구였다. 한 다리 건너 알게 된 그 친구가 어느 날 내게 말을 걸어왔다.
"너 오늘 학교 끝나고 콘서트 안 갈래?"
"누구 콘서트야?신승훈?"
"아니."
"그럼 이승환? 윤상?"
"아닌데......"
"그럼 누군데?"
"학기오빠."
"학기오빠?"
"그래, 박학기."
모두가 신승훈, 이승환에열광할 때 박학기를 좋아한다는 희진이를보며역시 보통의 여고생들과는 다르다는생각이들었다.
"그래 가자, 나 시간 괜찮아."
태어나서 처음 가보는 콘서트였다.
언제라도 다시 느낄 수 있다면
그 숨결에 내 가슴은 멈출 것 같아
그대에게 다시 전할 수 있다면
감출 수 없는 내 가슴은 말하고파
자꾸 서성이게 돼
한 번쯤 하는 생각에
나도 몰래 숨길 수 없는 이 생각에 오
자꾸 서성이게 돼
흔들릴 듯 부서질 듯 가냘픈 목소리였지만강한 발성이 고음에서도깨지지 않고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조곤조곤 불러주는 그의 노랫소리는단 한곡도 흘러가는 법없이 한곡 한곡 가슴에 들어와 맺히는 느낌이었다.시간이다 지나가버릴까 봐 아까워서조마조마하고 있을 때쯤 게스트로 나온 한남자가수의목소리는또 한 번의충격이었다. 짙은청색데님바지에 재킷까지한벌로 입고 키보드에 앉아 건반을 두드리며부르는 노랫소리는변성기를 거치지 않은 소년의목소리처럼 맑았다.
"희진아, 사람이 목소리가 어쩌면 저럴 수 있지?"
"아...... 영석오빠 원래 노래 잘하잖아."
희진이는 유영석이란 이름에 성을 떼고 오빠라는호칭을 붙여부르는 데에 거침이 없고 자연스러웠다. 마치 옆집오빠를 부르고 있는 듯. 나는황홀경에 취한 채 혼자 되뇌어 보았다. 영석오빠......
고2 때 난생처음 갔던 콘서트의여운은 오래머물렀다.
"너 나중에 학기오빠 콘서트 또 가고 싶으면 얘기해. 내가 학기오빠 팬클럽이거든."
"진짜? 근데 너 콘서트 몇 번이나 가봤어?"
"글쎄, 한...... 열 번은 되지 않겠어?"
콧등으로 살짝 내려온 안경을 올리기 위해 미간을 찡긋거리는 그녀의얼굴이 그날따라 한층 더 성숙해 보였다.
"나 한번 더 가고 싶어. 나중에 꼭 데려가 줘야 해."
1990년 박학기 콘서트를 관람하던 나는 어리고 순수했다. 가수의 목소리는 가슴과 귀에 그대로 꽂혀 심장을 슴벅거리게 했고무대를 감싸는 현란한 조명에 눈동자는 길을 잃은 듯 사방으로 움직였다.쩌렁쩌렁한 사운드는 나를 소리치게 했고설레게 했다.그날의영상은진한 색으로머리에, 가슴에 찍혔버렸다.
그 후부터 박학기와 유영석의 노래는 생에 처음 마주했던 그날의 콘서트장을생각나게 하고 무대에 뿌려졌던 코끝을 간지럽히던스모그 향기를 맡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