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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선희 Jul 16. 2023

쇼호스트의 꿈

"어릴 적 할머니와 함께 목욕탕에 갔을 때  몸을 밀어주던 할머니의 숨소리는 늘 힘에 부치고 힘겹게 느껴졌습니다. 그때 저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피부를 가볍게 스치기만 해도 때가 밀리는 타월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세월은 흐르고 세상도 많이 좋아진 지금, 제가 바라던 대로 힘들이지 않고 때가 밀리는 타월이 눈앞에 나타났습니다. 바로 ○○타월!"

"음...... 너는 항상 오프닝멘트가 참신해. 감동도 있고 좋아. 

근데.....

......

근데 말이지.....  "

"네?"

"그 목소리로는 안돼. 전달력이 전혀 없어."

"그럼 어떻게 해야 해요?"

"발성연습을 열심히 해야지."

쇼호스트출신 원장님은 아랫입술에 힘이 잔뜩 들어간 채로 나를 응시하며 잠시 골똘해졌다. 자신에게 관대하던 나는 그 모습을 아쉽다는 뜻을 담은 표현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큰애를 낳고 나서 부스스하게 퍼져있는 내 모습을 대할 때마다 , 온종일 아이를 안고 어르고 달래느라 허리에 끊어질듯한 통증이 찾아올 때마다 온몸을 짓누르무력감과 상실감이 찾아들었고 어느새 스멀스멀 우울감까지 파고들었다.

'나는 누구인가? 이대로, 아줌마로 딱딱하게 굳어져 가고 마는 건가?'

나 자신을 찾고 싶은 간절함은 입을 바짝바짝 마르게 했고 물을 찾지 않으면 탈진해 버릴 것만 같았다.


나는 무엇에 이끌리듯 쇼호스트아카데미에 전화를 걸었다.

"결혼 전엔 무슨 일을 하셨었나요?"

"저...... 리포터도 했었고 간간이 MC도 했었어요."

"아...... 그럼 기대해 봐도 되겠네요.

저희는 면접에 통과해야만 학원에 등록할 수 있습니다."


단장을 하기 위해 화장대 앞에 약속시간 3시간 30분 전부터 앉아 처녀 때 쓰던 화장품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얼마 전 인터넷으로 주문하고 나서 입고 나갈 곳 없어 쳐다만 보고 있던 옷도 옆에 차분히 걸어 두었다. 몇 년 만에 꺼내보는 형형색색 아이섀도의 뚜껑을 여는데 마치 선물포장지를 뜯는 마음이었다.

'와!! 색깔 너무 이쁘다.'

예전엔 늘 바르던 는데 새롭기 그지없었다.


학원은 하필 홍대에 있었다. 결혼 전 친구들과 부지런히 드나들던 곳. 오가는 젊은이들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동안 예전의 기억들이 새록새록 올라오기 시작했다.

'달라진 건 하나도 없는데 저곳에 나만 쏙 빠져있었구나.'


원장님은 수강생들 앞에 면접자들을 웠고 50여 명 정도 되는 선배들 앞에서 자기소개를 시켰다. 내 차례가 왔다. 나는 누구고 결혼 전엔 무슨 일을 했으며 멋진 쇼호스트가 되고 싶어 이 자리까지 왔다는 소개를 마치고 나니 너무 특색없고 건조한 것 같았다. 꼭 다니고 싶다는 간절함에 무리수를 던졌다. 

"김선희!! 너는 할 수 있어. 아자 아자 파이팅!"

박수갈채와 환호가 쏟아졌고 그렇게 기분 좋게 면접에 통과해 다음날부터 학원에 다닐 수 있게 되었다.


결혼 전 비슷한 경력도 있었고 남들과는 차별화된 감성소구에도 자신이 있었던 내게 쇼호스트만직업은 없다고 생각했다. 적당히 화려하고 유명세를 탈 수도 있고 늘 치장을 하며 신나게 바쁠 수 있는 쇼호스트라는 직업은 나를 살림만 하는 주부로 늙어가게 내버려 두지 않을 합리적인 돌파구라고 생각했다.


PT위한 대사를 짜는 것도 흥미 있었고 국내 내로라하는 쇼호스트들의 주옥과 같은 조언을 듣는 수업은 헐했던 마음을 채워주었다.

"와!! 이게 냉장고 맞아요?

마치 갤러리에 있는 멋진 작품을 떼어다 붙여놓은 같은 이런 디자인에 매료되지 않을 주부님들이 과연 있을까요?"

빈 공간에 허상을 만들어놓고 허우적대며 마치 판도마임을 하는 배우처럼 손짓을 하고 있는 나의 입을 가로막은 원장님의 목소리는 냉량했다.

"잠깐, 잠깐. 지금 뭐 하는 거야?"

"네?"

"냉장고 PT를 준비했으면 냉장고를 가져와야 하지 않겠니?"

"그걸 어떻게....."

"냉장고를 가져올 수 없다면 그림으로라도 그려와야지.

자...... 뭐라도 준비해서 PT를 하는 사람이랑 그냥 빈손으로 하는 사람이 있다고 가정을 해보자, 심사위원은 누굴 뽑을까?"

양손을 팔짱 낀 채로 찡그리고 있는 원장님의 미간에 불규칙한 내천자가 그려졌다.


조언을 허투루 듣고 싶지 않았던 나는 능력 이상을 보여주려 노력했다. 그 후옆집과 아래층에서 민원이 들어올 정도로 목청을 돋우며 발성연습을 해댔PT에 해당하는 제품을 구하기 위해 여기저기로 뛰어다녔다. 하드보드지를 자르고 붙이며 차트를 만드느라 거의 매일 새벽녘에 잠이 들곤 했다.


하지만 그런 노력에나는 결국 국내 굴지의 3사 홈쇼핑 시험에서 모두 고배를 마셔야 했고 어느 신생 인터넷 홈쇼핑 시험에 겨우 합격하긴 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마저도 촬영을 며칠 앞둔 어느 날 회사가 문을 닫게 되었다.


그렇게 1년여 동안 진이 다 빠져버릴 만큼 불사르다가 다시 오롯한 주부의 자리로 돌아오게 나는 그 시간을 되뇌어보았다. 남들 못지않게 화려한 시절을 보내던 내가 아이를 낳고 살림을 하면서 적잖게 우울해졌고 그곳은 살기 위해 찾은 곳이었다. 그렇게 새로운 세상을 맛보는 동안 충분히 행복했던 것 같다고 스스로를 다독거려 주었다. 어찌 보면 실체 없는 내 병을 찾아서 적절한 치료를 해 준 병원과 같은 역할을 해주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에까지 미쳤다. 길을 가다 그 길이 아닌 것 같으면 과감하게 다른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용기도 필요한 거고 열심히 했고 그걸로 충분했다고 위로하고 싶었다.


"여보, 생각해 보면 참 잘했던 것 같아."

"그럼, 그런 경험을 언제 또 해보겠어. 학원비가 비싸긴 했지만 난 아깝지 않다니까."

"그렇지, 뭐든 필요하지 않은 경험은 없는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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