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감독은 어떤 역할을 해야 할까? 3개월간의 고민과 시도들의 기록
올해 2월부터 문화역서울284 RTO의 기획감독으로 합류해 함께 일하고 있다. RTO는 2011년 옛 서울역사를 복원해 만든 문화예술공간, 문화역서울284의 가장자리에 위치한 (상대적으로) 작은 공간이다. 오래 전에는 여행자들의 짐을 보관하던 곳이자 미군 장병들을 안내하던 공간, RTO. 놀랍게도 나는 문화역서울284에 꽤 자주 가던 관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공간의 이름조차 몰랐다. 지나가다가 우연히 작은 전시가 열리는 것을 보고 '응? 여기에 이런 공간도 있었네?'하며 들어가 봤던 기억이 있을 뿐이었다. (딱 한 번 들렀었는데도 기억하고 있는 걸 보면 꽤 임팩트가 큰 공간이긴 했던 것 같다.)
나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에게 RTO는 신비스러운 존재였다. 그도 그럴 것이 문화역서울284의 인기 프로그램은 공간 투어에도 RTO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 공간의 아우라도 그러한 이미지에 기여한다. 전반적으로 복원을 거친 문화역서울284에서 RTO는 천장과 벽면, 바닥을 있는 그대로 노출한, 흔치 않은 공간이다.
메인홀을 중심으로 문화역서울284 일대에서 큰 규모의 전시와 이벤트가 전개되는 동안, 위치적으로 한 발짝 떨어져 있는 RTO는 상대적으로 자기 정체성을 만들기보다는 부대 공간처럼 활용되어 왔던 것이 사실이다. '365일 다채로운 문화예술이 펼쳐진다'는 의미를 담은 RTO365라는 이름의 프로젝트가 진행되어 왔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RTO를 일관된 캐릭터로 기억하지 못하는 점, 그보다도 인지조차도 하지 못한다는 점이 아쉬운 포인트였다. 그리고 그것이 내가 올해 함께 하게 된 이유이기도 했다. 지난 3개월 동안, 기획감독으로서 고민한 것과 시도한 것들을 이곳에 기록해 두려고 한다.
첫번째로 착수한 작업은 역시나 디깅하기. 문화역서울284의 원형은 1925년에 완공된 경성역이다. 문화역서울284에서 제공해 주신 복원 관련 자료, 직접 서치한 논문, 미디어 자료 속에 파묻혀 2월을 보냈다. 여러 자료들을 살펴보다보니, 일제강점기부터 해방, 한국전쟁까지 수많은 사건을 겪어온 이 건물이 새삼 신기하게 느껴진다. 내가 살아보지 못한 그 시절에도 존재했던 건물.
문화역서울284에 대한 자료는 꽤 많이 찾아볼 수 있었지만 수하물을 보관하던 RTO에 대한 자료는 찾아보기가 어려웠다. 집념의 디깅타임... 그렇게 찾고 찾다가 몇 가지 재미있는 것들을 발견했다. 첫번째는 1934년, 일제강점기에 촬영된 무성 영화 <청춘의 십자로> 속에 나오는 RTO다. (현존하는 한국 영화 중 두번째로 오래된 것이라 한다.) 어떤 사연으로 이 영화 속에 RTO가 나오냐면, 주인공의 직업이 경성역의 '수하물 운반부', 즉 손님들의 짐을 날라주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걸 발견했을 때 어찌나 재밌던지... 아, 너무 재밌어. 아쉽게도 RTO 내부의 장면이 담기지는 않았지만, 수하물 운반부들이 대기하거나 오가는 풍경들이 필름에 담겨 있어 그때의 모습을 짐작해볼 수 있다. 영상이 궁금하다면 한국영상자료원으로.
사실, RTO 공간은 역사적으로 많이 변형된 공간이기도 하다. 수하물 취급소로 활용되던 당시 사용되던 카운터는 철거되었고, 주한 미군의 RTO(Railroad Transportation Office)로 활용되면서 칸막이벽으로 작게 나뉘어 활용되었다고 한다. 처음 준공되었을 당시의 사진을 볼 수 있었는데, 처음부터 지금과 같이 거친 모양새는 아니었다. 변형된 공간들을 뜯어내면서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고 볼 수 있겠다.
아무튼 이렇게 디깅하다 보니, 고민이 생겼다. 그동안 RTO에서는 RTO의 본질적 특성(보관·안내)을 살린 기획을 진행하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올해는? 올해의 방향성에서 이 부분을 반영하는 것이 좋을까? 아니면 또다른 의미를 도출해낼 수 있을까? 이런 문제는 혼자서 고민하기보다는 함께 고민하는 것이 좋다. 더군다나 나는 이런 작업을 진행할 때, 그 존재를 자주 경험하고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함께 만들어가는 것을 좋아한다. 그래서 워크숍을 하자고 제안했다.
RTO 공간을 7년 가까이 운영해 오신 무대 주임님, 최근 RTO 공간을 담당해 왔던 주임님과 함께 지난 시간 동안 쌓여온 이야기와 앞으로의 방향성에 대한 아이디어를 모으는 워크숍을 진행했다. 워크숍을 진행하는 날, 그동안 내가 디깅했던 RTO의 스토리와 온라인에서 RTO 관련 피드백을 기반으로 얻은 인사이트를 키워드로 정리해서 먼저 공유했다.
그리고 RTO를 하나의 인물로 치환해서 상상해보는 워크숍과 KPT 모델을 활용한 회고적 방식의 워크숍을 진행했다. 그냥 '대화하자', '아이디어를 내보자'고 하면 무엇을 어떻게 말해야 할지 곤란하다. 결국엔 말하는 사람만 말하게 된다.
단계별 질문을 따라, 자기만의 시간을 충분히 가진 뒤, 서로의 생각을 존중하며 대화하는 순간을 좋아한다. 나는 알 수 없는 이야기들을 잔뜩 들을 수 있고, 중요한 힌트들을 수집할 수 있는 시간이기도 하다. '브랜딩'에 필요한 건 특별한 기술이나 이론, 소위 전문가의 일방적인 지시가 아닌 이미 존재하는 것들 중 가치 있는 것을 발견해 엮어내는 태도라고 생각한다. 마치 이야기의 직물을 짜내듯, 섬세하게.
워크숍을 통해 다양한 인사이트를 발견할 수 있었지만, 우리가 가장 주목한 키워드는 '발견'이었다. 생각해 보니 많은 것이 '발견'이라는 키워드로 엮였다. RTO라는 공간 자체가 '우연히 발견하는 공간'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나처럼 '응? 이런 곳이 있었어?'라고 느끼는 곳. 특유의 분위기 덕분에 한 번만 경험해도 절대 잊지 못하는 곳. 더 많은 사람들이 RTO의 매력을 '발견'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곳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얼마나 매력적인지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말하던 주임님들의 얼굴처럼. 그간 부대공간처럼 인식되며 이 공간에 어울리지 않는 프로그램도 왕왕 있어왔던지라 RTO라는 공간 자체를 '발견'할 수 있는 기획도 있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나눴다.
최근 RTO는 자기 정체성을 만들기 위해 다양한 시도들을 했는데, 그 중에서도 '커피', '재즈', '로컬' 등 작지만 뾰족한, 자기만의 문화를 만들어 나가고 있는 분야의 예술가 및 크리에이터, 브랜드와 협업한 작업들이 돋보였다. 그래서일까. RTO의 관객 리뷰 중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이 '단비 같다'는 표현이었다. 흔치 않은 콘텐츠를 경험할 수 있어서, 쉽게 만나보기 어려운 것을 조명해 주어서 반가웠다는 말. 이렇게 흔하지 않은 문화와 창작자를 '발견'하는 경험은, RTO에서 꽤 중요한 부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와 연관해 무대 주임님이 공유해주신 과거 에피소드도 참 재미있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을 꼽아 보자고 했더니, 몇년 전 사운드 아트 퍼포먼스가 열렸는데 자신은 난생 처음 보는 풍경임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모였고 자기만의 세계에 푹 빠져서 몸을 흔들던 모습이 잊혀지지 않는다고 했다.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그 모습이 좋았더란다. 아아, 어쩐지 그 이야기를 들으니 그때의 풍경을 다시 펼쳐 보이고 싶어졌다.
문화역서울284에 RTO라는 공간이 있었어? 이 공간이 이렇게 매력적이고 재미있는 공간이었나? 이런 세계도 있었어? 쉽게 만나볼 수 없는 콘텐츠 실험들을 이곳에서 이렇게 만날 수 있다니! 그런 느낌을 올해 내내 쭈욱 이어가보면 어떨까?
RTO의 경우는, 아직 많이 알려지지 않은 공간이기도 하고 새로운 콘텐츠 실험이 필요한 단계이기도 했기에 급하게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실행하기보다는, 앞으로의 RTO를 함께 만들어 갈 주요 파트너들과 관계를 맺고 탄탄하게 기획을 해나가는 것이 더 중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시작 일정을 하반기로 과감하게 미루고 완전히 새로운 프로그램을 하나 기획했다. RTO라는 공간을 소개하고, 우리의 고민을 솔직담백하게 나누고, 함께 해보지 않겠냐고 제안하는, 일종의 초대장과 같은 행사. 바로 <RTO 요모조모>다. RTO의 요모조모를 둘러보고, 앞으로의 요모조모를 함께 상상해보자는 의미로 이렇게 이름을 붙였다. (승연 주임님의 아이디어!)
공식 일정을 포함해 약 2~3주에 걸쳐 RTO의 문을 열고 다양한 크리에이터들과 만났다. 연극, 현대무용, 커피, 인디음악, 디자인, 재즈…분야는 다양했지만 흥미롭게도 RTO에 이끌려 찾아온 사람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었다. 자신의 영역 안에서 무언가 다른 것을 꿈꾸고 만들어가는 사람들이라는 것. 높고 빠르게 가기보다 자기답게 가는 사람들. 나는 그런 사람들이 또다른 문화를 만든다고 생각한다. 그들과 함께 이런 거 해보면 어떨까요? 여기를 이렇게 써보면 어떨까요? 를 상상하는 시간들이 즐거웠다. 집으로 돌아오던 어느날, 오랜만에 마음이 벅차는 감정을 느꼈다.
올해 작업을 시작하면서 '기획감독은 어떤 역할을 해야 할까'를 많이 고민했다. 일방적으로 정하고 지시하는 건 내가 좋아하는 방식도, 잘 하는 방식도 아니기에 나는 충분히 듣고 그 이야기들이 흩어지지 않도록 명확한 방향성을 제시하고 하나로 엮어내는 역할을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에 더해, 요모조모를 진행하면서 깨달은 것이 있었다. 나는 단순히 공간을 '채우는' 역할이 아닌, 전에 없던 것을 만들고 새로운 문화를 만들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힘이 되는 동료가 되고 싶다는 것을. 그게 결국 공공의 역할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많은 사람들과 RTO에 대한 대화를 나누며 많은 영감을 얻기도 했다. 올해 RTO는 이런 공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쓸모 없어 보이는 것의 쓸모를 찾는 곳, 가장자리의 이야기를 전하는 곳, 사람들이 자신에게 중요한 것을 맡기고 또 찾아가는 곳, 말을 붙이는 곳… 이제 다양한 콘텐츠들을 꿰어 하나의 맥락으로 펼쳐내는 작업에 들어간다. 홍보물 제작부터 메시지 디자인, 콘텐츠 기획까지 가열찬 요즘이다. 다음 이야기는 다음에 계속.
이렇게 3개월을 돌아보니, 나는 '깊이 파고들어 이해하기', '쌓여 있는 이야기를 모으는 자리 마련하기', '핵심이 되는 키워드(인사이트) 찾기', '쉽고 명확한 언어로 방향성 제시하기', '여지를 열어두고 함께 상상하기'를 했구나, 싶다. 음, 사실 이 언어와 분류로 포괄되지 않는 작업과 생각들이 많다고 생각하는데 이게 지금 상태의 내 색깔이자 스타일이겠지. 이러한 작업들을 '브랜딩'이나 단순한 '기획'이라는 언어로 표현하기에는 충분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 요즘 '문화매개' 개념을 다시 탐구하고 있다. 부디, 올해를 마무리할 때쯤엔 내 언어로 나의 작업을 더욱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게 되기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