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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해리 Dec 28. 2022

쓸데없는 일의 쓸모

나에게는 오래된 물건을 수집하는 취미가 있다. 오래된 열쇠, 말을 타고 다니던 시절 발을 디디는 용도로 만들어진 등자, 부서진 조각품, 우편물의 무게를 달던 저울, 1960년대 백화점의 광고 전단과 같은 것들을 모은다. 공통점은 '쓸모를 잃어버린 물건들'이라는 것. 그런 물건들을 특히 좋아한다.


세계 곳곳에서 보물찾기 하는 중


여행을 하다가 마음을 끌어당기는 물건을 만나면 그 앞에 서서 한참을 바라본다. 그리고 상상해본다. 이 물건의 오래 전 모습을, 그리고 나에게로 와서 갖게 될 새로운 쓸모를. 이건 나만의 창조적인 놀이다. 하루종일 해도 지루하지 않다. 아, 이건 연필꽂이로 쓰면 좋겠어. 여기에 내가 소중하게 여기는 편지들을 넣어 놓으면 어떨까? 이건 나의 다짐들을 적어 놓는 용도로 써야겠다. 이런 생각들을 하고 실제로 실현하는 건 정말 즐겁다. 특히나, 나도 예상치 못한 쓸모를 발견하게 되면 얼마나 기쁜지 모른다.


빈티지 석판은 우리집 메뉴판으로 쓰임을 가지게 됐다.


그런데, 처음에는 좀 달랐다.


"왜 쓰레기를 돈 주고 사는거야? 귀신 나올 것 같아. 무서워."

"혹시, 빈티지 샵 같은 거 하려고 그래?"

"그거 해서 나중에 뭐 하려고 그래?"


그런 반응에 위축되어 손에 든 물건을 내려놓거나 하던 일을 그만둔 적이 많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리 대중적이지 못한 내 취향 앞에서 나는 자주 소심해졌다. 누군가의 말마따나 내가 하는 일들의 대부분은 '쓸데없는 것'이었고, 그 일들의 쓸모를 묻는 질문에 답하지 못할 때면 슬펐다. 내가 좀 이상한 걸까? 남들이 하는 이야기는 신경 쓰지 않고 내가 좋아하는 것을 마음껏 좋아하는 것, 내 마음이 하는 목소리를 따라서 가보는 것. 이렇게 써놓고 보니 쉬운 일 같지만 쉽지만은 않았다. 다른 게 아니라 틀린 것일까봐, 두려웠던 것 같기도 하다.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다. 오래된 물건이 또다른 제자리를 찾게 되는 것처럼, 목적을 생각하지 않고 좋아하는 마음만으로 쌓아올린 일이 뜻밖의 쓸모를 갖게 되는 순간들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것을 찾고 그것을 끝까지 밀어붙여 나만의 세계를 만들어냈을 때, 그 세계는 내게 큰 힘이 되어 주었다. 좋아하는 것을 주제로 여행을 떠나는 즐거움을 알게 되었고, 비슷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연결되었다. 의도했던 것은 아니지만 쓸모를 전혀 생각하지 않고 했던 것이 ‘일’이 되어 주기도 했다. 정말 신기한 감각이었다.


성수동 메쉬커피 지하 워크룸에서, 아카이브 성수 멤버들과 함께.


#성수동


지금은 이사를 와서 멀어졌지만, 성수동 근처에 살 때는 성수동만의 문화와 숨은 이야기를 찾아 다니는 재미에 푹 빠졌다. 성수동에서 자주 놀기 시작했고, 동네에서 이런 저런 활동을 했다. 그 당시에는 '그런 거 뭐 하러 해?'할 만한 사소한 일들이었다. 자연스럽게 '성수동'하면 나를 떠올려 주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해리야, 나 지금 성수동인데 어디 가면 좋아?"라며 전화가 걸려오는 일도 늘었다. 돌아보니 성수동과 관련된 기획을 참 많이도 진행했다.



성동구의 생활문화를 발굴하고 매개하는 생활문화사업, 4명의 예술가와 함께 성수동에서의 일상을 기록하는 아트 프로젝트 <아카이브 성수(Archive Seongsu)>, 현대백화점에서 진행했던 <메이드 인 성수(Made in Seongsu)>, 성동구청과 협업한 성수동 도시재생사업 스토리북 제작, 남의집 프로젝트의 성수동 로컬 큐레이터 활동, 성수동의 로컬 브랜드 10곳을 모아서 팝업 전시와 마켓을 열었던 <Why We Love Seongsu>까지. 모두 성수동을 진심으로 좋아하고 디깅하며, 열심히 놀았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일이었다.


Why We Love Seongsu 현장


#우리문화 


내가 또 푹 빠져 오랫동안 디깅하고 있는 것이 바로 '우리 문화'다. 우리 나라의 오래된 이야기나 공예품, 골동품을 수집하는 일도 좋아하고, 박물관을 가는 것도 좋아하고, 우리만의 문화를 무엇이라 정의할 수 있을까 늘 궁금하다. 이걸로 딱히 뭘 해볼 생각도 없었고 그냥 너무 좋아하는 것 중 하나였다.


나의 박물관 역사


그런 관심사로 여러 이야기를 찾아 다니다가 '우리 뿌리 미감'을 이야기하는 이서재 작가님을 만나게 되었다. 작가님은 서촌의 한옥을 직접 고쳐 만든 집이자 작업실을 기반으로, 우리 문화와 태도로서의 예술에 대한 이야기를 꾸준히 전하고 계신다. 작가님의 작업과 이야기가 좋아서 기회가 닿을 때마다 그곳을 찾곤 했다. 함께 인왕산을 올라 도시락을 먹기도 하고, 한옥의 마당에 앉아 대화를 나누기도 하면서 작가님에게 많은 것을 배웠다. 모두 계산 없이 이루어진 일이었다.


이서재에서, 작가님과 함께 보낸 시간들


그런데 동양가배관의 공간을 오픈할 무렵, 이 모든 것들이 신기하게 연결되기 시작했다. 내가 좋아해서 모았던 오래된 물건들과 공예품들이 공간에 자리하게 되었고, 이서재 작가님의 작업을 공간 한 켠에 걸게 되기도 했다. 이 모든 것을 갑자기, 컨셉으로 하려고 하면 할 수 있었을까? 아마 아닐 것이다. 공간을 찾아 주는 손님들 또한 이렇게 오랫동안 쌓인 시간의 힘을 좋아해 주시는 게 아닐까 싶다.


동양가배관 공간에 놓인 이서재 작가님의 작업


최근에는 그런 신기한 연결이 많이 일어났다. 군산에 생활예술과 관련된 자문을 하러 가게 된 것도, 예술경영지원센터의 브랜드 정립 프로젝트를 하게 된 것도, 태국 문방구의 팝업 기획을 맡게 된 것도, 내가 좋아하는 사소한 무언가에 깊이 몰두하면서 나만의 독특한 지점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 내가 진짜 '나'의 목소리를 들어주기 시작하게 된 것도 '내가 좋아하는 작은 것'의 가치를 스스로 인정해 주면서부터였던 것 같다. 타인이 좋아하는 것이 아닌 내가 좋아하는 것, 세상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에 시선을 두게 됐다. 그러면서 오히려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내기도 했다.


그러니까, 쓸데없는 일이 어쩌면 가장 쓸모 있는 일일지도 모른다. 앞으로도 나는 나에게 소중한 '쓸데없는 일'을 열심히 하고 싶다. 그 속에서 나만의 의미를 발견하고 연결하며, 뜻밖의 쓸모를 만들어내며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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