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을 운영하기 시작하면서 가장 흥미로운 건 사람들의 반응을 '즉각적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어떤 것을 궁금해하고, 어떤 말과 행동을 하는지, 어떤 것에 반응하는지 보면 놓치고 있던 것을 발견하게 되기도 하고, 우리의 어떤 부분이 매력적으로 다가가는지도 알게 된다. 책상 위에서 기획서만 쓸 때는 알 수 없던 것들을 감각으로 깨우친다는 것. 그게 현장의 매력이 아닐까.
동양가배관 공간에 있다 보면 가장 자주 듣게 되는 말이 "동양가배관은 무슨 뜻이에요?"다. 지나가면서 입 밖으로 '동양가배관'을 소리내어 읽으며 '이게 무슨 뜻일까?'라고 서로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도 꽤 많다. 너무 자주 질문을 받다 보니 이제는 아래의 문장을 매장 한 켠에 크게 써붙여 놓게 되었다.
먼 옛날, 가배는 차 한 잔을 두고 몇 시간씩 집필을 하거나 토론을 하는 예술가들을 위한 섬세한 벗이었습니다. 또한 가배관은 낯선 이국의 문화를 향유하고 새로운 감각과 만나는 취향의 매개이자 영감의 산실이었습니다. 동양가배관은 우리 곁의 문화를 이야기하는 오늘날의 가배관이 되고자 합니다.
사실 이 문장은 공간을 만들기 전부터 써 놓았던 것이다. 공간을 만들기 몇 년 전부터 이름을 짓고 브랜드 스토리를 만들었으니 좀 특이하다 여기는 사람들도 있을 것 같다. 지금 생각해 보면 우리가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생각을 쌓아온 시간이 제법 길었기에 우리에게 잘 맞는 지역과 공간을 만날 수 있지 않았나 싶다.
동양가배관은 문화기획자인 나와 커피 로스터인 성은이 함께 만든 브랜드다. 중국을 오가며 비즈니스 인사이트 콘텐츠를 만드는 프로젝트에 잠깐 합류한 적이 있는데, 그때 성은을 만났다. 성은은 오랫동안 커피 한 길만 걸어온 사람이었고, 언젠가 자기만의 브랜드를 만들고 싶다고 했다. 나는 브랜드와 콘텐츠를 만드는 일을 해왔던 사람이라, 함께 무언가를 해볼 수 있겠다 싶었다. 중국에서 다양한 브랜드를 경험하면서 자연스럽게 "브랜드를 만든다면 어떤 브랜드를 만들고 싶어?"라는 대화를 자주 나누게 되었다. 그때 우리에게 영감이 되었던 건 전통문화를 현대적 감성으로 소개하는 중국 로컬 브랜드들이었다. "우리도 브랜드를 통해 우리 문화를 전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된 계기였다.
"그런데 나 브랜드 이름 있어."
"뭔데?"
"성은커피."
"있잖아, 이름부터 다시 지어야 할 거 같아..."
이거 어때? 저거 어때?를 반복하다가 함께 보러 간 전시장에 놓인 책 속에서 '가배'라는 단어를 발견했다. 우리 나라에 처음 커피가 들어왔을 때 커피는 ‘가배’라는 이름으로 불렸고 커피를 판매하는 ‘가배관’에는 예술인들이 모여 이국의 문화와 영감을 나눴다는 이야기가 힌트가 됐다. 처음으로 커피가 그저 음료가 아닌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문화적 매개'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가배’라는 단어가 품은 고전적인 느낌과 성은의 특징(좋은 재료로 깔끔하게 로스팅하는 커피, 군더더기 없이 담백한 성정, 차분한 음악, 고요한 자연에 대한 취향)이 잘 어울린다고도 생각했다.
커피를 통해 우리 곁의 문화를 이야기하는 브랜드가 되자며 '동양가배관'이라는 이름을 지었다. 로고도 만들고 싶었지만, 돈이 없었다. 기계가 아닌 손으로 도장을 파주는 곳에 가서 도장을 파고 이것을 로고 삼아 활동을 시작했다. (실제로 현재 공간 간판에 새겨져 있는 '동양가배관' 글자가 그때의 글자다.)
직접 로스팅한 커피를 함께 여행하는 사람들에게 내려주며 '동양가배관'이라는 이름을 알린 그 순간이, 이 브랜드의 시작이라 할 수 있겠다. 방산시장을 돌며 찾아낸 박스에 커피를 담아 정성껏 포장하고 선물하던 순간들은 지금 보면 어설프지만 또 가장 열정적인 시기가 아니었나 싶다.
이름을 짓고 나니 새로운 질문이 생겨났다. '그래서 우리가 전하고 싶은 문화는 뭘까?'라는 것. 문화라는 것이 너무나 광범위하다보니 그래서 우리가 좋아하는 것, 아름답다고 여기는 것, 전하고 싶은 문화가 무엇인지 발견하는 것이 먼저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후로 곳곳을 다니며 우리에게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우리의 새로운 놀이이자 일이 되었다. 정확하게 설명할 수는 없지만 왠지 '동양가배관스럽다'라고 느껴지는 사물들을 수집하기도 하고 다양한 분야의 크리에이터들과 함께 콘텐츠를 창작하며 커피 브랜드로서는 조금 특이한 작업들을 이어왔다. 그런 과정을 거치며 조금씩 우리만의 색깔과 기준을 만들어왔던 것 같다.
그렇게 몇 년이 흐르고 나니 '동양가배관만의 공간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고, 우연히 인천 원도심 배다리라는 동네를 발견하게 되면서 우리의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동네를 발견한 이야기는 아래 링크에서, 공간을 만든 과정의 이야기는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