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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해리 Nov 23. 2024

문화예술이 도시에
변화를 일으킬 수 있을까

이상하고 엉뚱한 책의 경험, 언노운 북 페스티벌을 기획하다.

어느날, 성은이 '배다리 축제 공모' 소식이 떴다며 우리가 지원해보자고 했다. 응? 축제? 우리가? 왜? 처음엔 그랬다. 축제를 만드는 곳에서 일해본 적이 있었기에 그게 얼마나 힘든지 알고 있었고, 감당할 자신이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생각은 점점 '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 쪽으로 흐르기 시작했고, 축제와 관련된 다양한 자리에 찾아가기도 하고 책을 읽기도 하며 축제에 대한 말들을 수집하는 나를 발견했다. '교류와 대화가 일어나는 시간의 확장', '공공공간과 거리, 야외에 대한 재해석과 상상', '축제를 만드는 과정에서 형성되는 주민-예술가의 관계', '도시 개발에 대한 시선을 재조명하는 역할', '포용적 사회를 가능케 하는 문화적 다양성', '새로운 관계를 맺을 기회' 등 축제에 관한 다양한 말들 속에서 나는 축제를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를 자주 생각했다. 


그러다 결국 '우리가 지난 2년 동안 이곳에서 활동하면서 해왔던 실험들, 우리가 발견한 동네의 매력을 엮어 한데 펼쳐내면 그게 바로 축제가 되지 않겠어?'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아니야...), 그간 우리와 진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배다리를 자주 오가던 슈퍼소닉 스튜디오의 영진, 주희가 기꺼이 기획 스태프로 합류해 주었다. 디자이너 지현이 비주얼을 맡아 주기로 했고, 공공예술 프로젝트 경험이 있는 태슬남 작가가 공간 연출을 도와 주기로 했다. 축제 막바지에는 동네 주민이자 마침 회사를 그만둔 건우도 손을 보탰다. 동양가배관이 문을 열던 때부터 지금까지 우리를 꾸준히 기록해주었던 승균, 인천음미 프로젝트로 연을 맺은 주민 민성이 포토그래퍼로 참여하기로 했다. 모두의 손을 모아 그렇게 제 1회 언노운 북 페스티벌이 탄생했다. 



역사상 가장 역동적이었을 개항기, 조선인들이 모여 살던 마을. 인천에서 살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헌책을 사고 팔던 기억이 있는 마을.  지금도 여전히 책과 문구를 사랑하는 사람들, 책을 둘러싼 문화를 만들어가는 사람들이 함께 하는 동네. 인천 배다리 마을에서 '이상하고 엉뚱한 책의 경험'을 제안하는 축제가 열립니다. 

경계를 넘나들며 독특한 콘텐츠를 만들어 온 문화기획자들이 모여 일을 벌이고 있습니다. 헌 책방과 자기만의 개성이 있는 전문 서점, 문구점과 오래된 이야기가 있는 마을 곳곳에서 열리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경험하고, 흥미로운 실험을 함께 펼쳐 봐요! 자, 그럼 제 1회 언노운 북 페스티벌 시작!




저희, 책 축제를
해보고 싶어요.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언노운 북 페스티벌'은 우리가 우리 공간을 벗어나 지역에 손을 내미는 계기가 된 행사였다. 그 전까지는 우리 공간을 잘 운영하는 것에 집중했다면, 지역 기반 축제를 기획하기로 결심하면서부터는 자연스럽게 '나'만이 아닌 함께 하는 사람들을 생각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일단 '이곳만의 북 페스티벌을 만들어 보겠다'고 선언하고 '동네의 책방과 함께 무언가 해보면 좋겠다'는 아이디어를 내긴 했지만 이걸 현실로 만들려고 하니 풀어나가야 할 것들이 많았다. 일단, 지역의 책방들을 찾아가 공식적으로 인사를 드리고 우리의 계획을 공유하는 것이 먼저였다. 이 과정에서 내가 깨닫게 된 것은, 지역을 지켜온 책방이 있기에 언노운 북 페스티벌과 같은 아이디어도 나올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를 인지하자 내가 배다리 지역에는 왜 이렇게 책방이 많은지, 책방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지, 이들은 어떤 사연으로 이곳에서 공간을 운영하는지를 모르고 있다는 사실이 부끄러워졌다.


축제를 준비하며 쓴 일기


그때부터 지역의 책방들을 디깅하는 시간을 가졌다. 온라인에 올라온 기사들을 전부 찾아보며 정리했고, 손으로 얼기설기 정리한 내용을 진(zine)으로 만들어 책방에 들고 가서 보여드리면서 사실 확인을 했다. 이렇게 만든 진(zine)을 여러 부 만들어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책방을 안내하는 도슨트 프로그램도 진행했다. 



진(zine)을 가지고 구청의 홍보 담당자에게 책방을 소개하는 책자를 만들면 좋을 같다고 설득해 <배다리 책방을 여행하는 법> 책자를 제작하기로 했다. 책방 하나하나를 직접 인터뷰해서 책자를 만들었다. 대부분의 책방이 인스타그램도 운영하지 않는 오래된 곳이기에, 책방에 대한 스토리가 대중적으로 알려져 있지 않았고 이 모든 책방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콘텐츠가 없었기에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게 되었다. 



책자는 방문객들에게도 큰 인기를 끌었고, 무엇보다 책방들에서 가장 기뻐했다. 한 분 한 분 인터뷰를 하며 이야기를 경청하고, 이것을 아름다운 책으로 엮어내는 과정에서 우리가 그들을 존중하는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사람들에게도 이들이 쌓아온 문화와 역사를 존중하자는 제안을 하고 싶었다. 그 마음이 통했던 것일까. 매달 열리는 책방연합회의에서 만장일치로 '언노운 북 페스티벌'에 모두 참여하겠다는 답변을 받았다. 사실, 이 분들이 참여하지 않으신다면 축제 자체를 진행하지 않으려 했었기 때문에 눈물나게 기뻤다. 자, 이제 시작이다.




이 축제를 좋아할 만한

사람들과 함께 만들자


예산이 풍족한 축제도 아니었고 기획 스태프는 달랑 3명. 우리가 본능적으로 선택한 전략은 '동료를 많이 모으는 것'이었다. 우리와 취향이 비슷한, 이상하고 엉뚱한 책의 경험을 함께 만들어 보고 싶은 동료들을 모으기로 했다. '축제에 함께 하겠다'고 밝힌 사람들이 모이는 자리를 만드는 것이 첫 시작점이었다. 축제가 열리기 3개월 전, 뜨거운 여름날 함께 동네를 걷고 인사를 하고 매년 열리는 '15분연극제'를 경험했다.



축제를 함께 만들어갈 사람들이 꾸려진 후, 언노운 북 페스티벌의 대표 프로그램인 '헌책 큐레이션展'에 참여할 크리에이터 10명을 지역에 초청했다. 사전에 인터뷰해서 파악한 헌책방 5곳의 특성과 어울리는 크리에이터들을 2명씩 매칭했고, 이들은 축제 전에 지역에 방문해 책방에 대한 소개를 듣고, 자신이 매칭된 책방을 디깅해 헌책을 큐레이션하고 노트를 쓰는 시간을 가졌다. 


지역의 헌책방을 디깅하는 헌책 큐레이터들


동네에서 발견한 것을 재료로 창작하는 아트 프로젝트에 참여한 영민, 이하여백, 장주환 작가 역시 여름 무렵부터 지역을 여러 번 방문하며 관계 맺는 시간을 가졌고 지역에서 받은 영감을 다양한 아트워크로 만들어냈다.


그동안 진 워크숍을 거쳐간 사람들에게 '우리, 진 메이커스 마켓을 열자!'는 제안을 보내기도 했다. 사실 진 메이커스 마켓은 사례가 없는 일이라서 모두가 당일까지 (기획자마저도) 뭐야? 어떻게 해야 하는거야? 아, 몰라! 우리 마음대로 해! 하며 벌였던 일이었다. 그래서 더 재미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축제를 핑계로

동네 곳곳의 공간을 찾아가자


지역을 처음 찾는 사람들은 모든 곳이 낯설게 느껴지고 '내가 들어가도 되나?'하는 어색함을 느끼기 쉽다. 축제를 준비하며, 지역 공간들을 축제 공간으로 만들어 콘텐츠를 배치했고 사람들이 이를 핑계로 공간의 문턱을 넘기를 바랐다.


동네 곳곳을 돌아다니며  '여기는 대화하기 좋은데?', '이곳은 분위기가 있어', '여기는 디깅하는 재미가 있잖아?' 공간에 대한 상상을 거듭했고, 각 공간을 프로그램의 무대로 만들고자 했다. 아벨서점 2층은 연극이 펼쳐지는 공간이 되었고, 문구점은 워크숍의 재료를 찾는 탐구의 공간이 되고, 주먹밥집은 페스티벌 스태프를 위한 스탭밀 식당이 되었다. 사람들은 축제를 핑계로 문을 밀고 들어가 인사를 나누고 서로 연결되었다.





지역의 사람들이
주인공이 되는 프로그램을 만들자



우리가 모든 것을 하기보다, 지역 사람들이 주인공이 되는 프로그램을 만들고 싶었고 이미 존재하는 것을 잘 엮여내는 역할을 하고 싶었다. 책방 운영자, 목수, 로컬 아키비스트 등 동네에서 공간을 운영하고 있거나 활동하고 있는 사람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눴고 그 결과로 '아이디어 파티', '헌책방 의자 수리 워크숍', '그림책 낭독회' 등 재미있는 프로그램들이 탄생했다.

 



문화예술이 도시를
변화를 일으킬 수 있을까


사실은 축제를 준비하는 내내 ‘이 조용한 거리에 정말로 사람들이 모일까?’ 걱정했다. 걱정이 무색하게 축제가 열리던 3일, 정말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아 주었다. 서울뿐 아니라 광주, 부산, 제주에서도 왔고 우리 때문에 숙소를 잡았다는 고마운 사람도 있었다. 사람들이 즐거운 얼굴로 거리를 오가고 끊임없이 문을 밀고 들어왔다. '어제랑 같은 동네가 맞나?' 기분이 묘했다. 어떤 분은 전시장에서 3시간을 머무르며 진을 만들었고 주말은 시간이 안 돼서 친구랑 부랴부랴 달려왔다는 분은 리플렛을 자랑스럽게 꺼내 보이며 웃었다.


이 축제는 내게도 새로운 경험을 많이 안겨주었다. 전화나 메일로 소통하는 것이 아니라 동네를 뛰어다니며 마을 사람들, 헌책방 사장님들과 만나고 대화했으며 30여명이 넘는 크리에이터들을 지역에 연결했다. 고맙다는 말을 자주 들었고 아름다운 장면들에, 문화를 지켜온 생각들에, 마음이 자주 말랑말랑해졌다. 축제가 끝난 다음날, 지역을 50년간 지켜온 헌책방 ‘아벨서점’의 곽현숙 사장님께 문자가 한 통 도착했다.


안녕하세요, 김해리씨! 많은 일을 해 가면서 몸을 바지런히 동하며 정리해 가는 모습에서 무어라 표현할 수 없는 고마움이 마음에 맴돌았습니다. 당당하면서도 들을 귀를 열어 놓고 작은 움직임으로 전체를 정리해가는 가식의 언어가 필요하지 않은 몸짓들이 늙은이 가슴에 생기를 불어넣어 주었습니다.

꼬깃꼬깃하게 메꿀 자리를 메꾸어 내고 돋울 자리를 돋아내는, 그래서 하루를 여유로 걷게 하는 그 힘이, 성실에 머리를 두지 않으면 갈 수 없는 길임을 언뜻 알아차려 가는 중이라 고맙다는 마음이 호수의 파문처럼 스며 들어서네요. 행사 후 건강 잘 챙기시길…

2023년 11월에
아벨서점 곽현숙


사실 오랫동안 콘텐츠를 만들고 사람들이 모이는 현장을 만들어왔지만 내가 하는 일이 사회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감각을 느껴본 적은 없었는데, 콘텐츠의 힘과 책임감을 처음으로 실감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그저 그동안 해보고 싶었던 재미있는 일을 해보겠다는 마음이었는데 그 마음이 점점 주변으로 퍼져 나갔다. 자신의 속도로 자신의 이야기를 펼치는 자리를 만드는 일, 서로가 연결되는 계기를 만드는 일, 자신이 이미 가진 것을 발견하고 살피도록 돕는 일. 그런 일을 더 잘 해보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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