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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에 찾아온 후배들

32년 9개월의 시간은 핫되지 않았다

by 최국만


직장 생활은 결국 사람을 남기는 일이다.

직함은 지나가고, 프로그램도 사라지고,

방송은 시간이 흐르면 다른 소식에 묻혀 흔적이 희미해지지만

마음으로 이어진 인연만은 끝까지 남는다.

퇴직 후 3년이 지난 겨울, 나는 그 사실을 몸으로 알게 되었다.


퇴직한 지 3년이 지나면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이 다녔던 회사를 마음속에서조차 멀리하게 된다.

현직일 때 부하 직원들이 줄 서서 인사를 하던 선배들도

퇴직하고 나면 전화 한 통 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하지만 나는 달랐다.

아니, 나를 둘러싸고 있던 사람들이 달랐다.


현직 시절, 나는 누구보다 후배들을 아꼈다.

그들이 힘들면 함께 힘들어하고,

그들이 밤새 편집실에서 쓰러지듯 눕는 모습을 보면

말없이 옆에 앉아 컵라면이라도 같이 먹으며 버텨주었다.

시사프로그램은 늘 피를 깎아 만드는 현장이었고,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등불이었다.


여름휴가를 앞두고 후배가 찾아와 말했다.

“부장님… 휴가 좀 다녀오고 싶은데… 다음 주가 제 방송 차례라서요.”


나는 그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안다.

시사PD는 휴가를 가려면

자신의 회차를 미리 완성해놓아야 한다.

아이템 찾고, 취재하고, 밤새 편집하고, 원고 쓰고, 자막 넣고…

휴가란 말이 무색해지는 노동이었다.


그래서 나는 말했다.

“내가 네 방송 다 해줄게. 걱정 말고 다녀와.”


그 순간 후배의 얼굴엔 놀람과 눈물이 동시에 스쳤다.

나는 알고 있었다.

그 후배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책임감으로 이 일을 버티고 있는지,

그리고 그에게 잠시라도 숨을 고를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나는 후배를 보냈고,

후배는 돌아와 더 단단해져 있었다.


그렇게 시사PD, 작가, 리포터, 외주PD들까지

우리는 하나의 가족처럼 일했다.

서로의 사정까지도 속속 들여다보던 시절,

그리운 시간들이다.


겨울, 눈보라 속에서 찾아온 후배들


어느 겨울날, 전화가 왔다.

“국장님, 보고 싶어서 1박 2일로 괴산으로 갑니다.”

후배 PD 둘, 카메라 부장까지

총 세 명이었다.


눈발이 길을 가득 채우던 날,

그들은 장을 가득 봐서 휴양림에 나타났다.

그날 밤부터 다음 날 아침까지

세 사람은 번갈아 ‘프랑스 요리’를 나에게 대접했다.


쇠고기를 굽고, 버섯을 다듬고,

파스타를 만들고, 소스를 끓이며

그들은 말했다.


“국장님과 함께 취재 다니면서

정말 죽을 만큼 힘들었지만

그때가 아니었으면 우리 지금 없습니다.”


“국장님 아니었으면

우리는 방송이 뭔지도 모르고

사람 사는 냄새도 모르고 지나쳤을 겁니다.”


눈보라가 휴양림 창밖을 때리는 그 순간,

후배의 한 마디가

내 가슴을 찢었다.


“퇴직하고도 둘러보면

찾아갈 선배가 있다는 게…

저희에게는 행운입니다. 국장님은 그런 선배예요.”


그 말에

나는 몰래 고개를 돌려 눈물을 닦았다.


사람은 결국 사람으로 남는구나


내가 KBS에서 보낸 32년 9개월의 시간.

그게 결코 헛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퇴직 후,

그 겨울 밤,

후배들이 내 손에 쥐여준 따뜻한 접시 하나에서 깨달았다.


요즘은

퇴직하면 서로 잊는 시대다.

연락도, 방문도, 마음도

조용히 사라지는 시대.


그런데 나는

퇴직 후 3년이 지나도

요리를 해들고 찾아와주는 후배들이 있다.

전화를 하며 “아빠”라고 부르는 작가들이 있다.

내가 괴산에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눈보라를 헤치고 찾아오는 후배들이 있다.


이보다 더 큰 성공이 어디 있을까.


나는 겨울이면 생각한다.

왜 저 아이들은 나를 찾아온 걸까?

내가 그들에게 무엇이었기에?

나는 어떤 삶을 살았기에

퇴직한 후에도 그렇게 마음을 보내오는 걸까?


그리고 조용히 답한다.


사람은 결국 사람으로 남는다.

일이 아니라 마음이 기억된다.

경력보다 관계가 오래 간다.


그날 눈보라 속에서

프랑스 요리를 먹으며 울었던 나는

지금도 그 생각을 한다.


지금 내 삶에서 가장 빛나는 상은

방송국에서 받은 상패가 아니라

퇴직 후에도 나를 찾아와

함께 웃어준 후배들의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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