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 만에 건넨 주방의 주도권
새벽 4시 50분.
세상이 어둠 속에 몸을 웅크린 시간,
나의 하루는 낮은 기도 소리로 깨어난다.
"오늘도 우리 모두에게 마음의 평화와 인도를..."
침대 곁 아내는 여전히 깊은 잠에 빠져 있다.
지난주, 나는 아내에게 특별한 선언을 했다.
40년 동안 나를 위해 밥을 지어준 당신,
이제는 쉬라고.
이제부터는 내가 당신의 밥을 지어주겠노라고.
서로 하겠다는 기분 좋은 실랑이 끝에,
결국 주방의 주도권은
나의 몫이 되었다.
양파를 썰고, 당근을 다듬는다.
고구마를 깎아 프라이팬 위에서 조심스레 익힌다.
아내가 암과 싸우기 시작한 지 어느덧 2년.
우리의 식탁은 소박한 채소들로 채워졌다.
계란을 반숙으로 부치고,
버섯들을 살짝 데쳐 접시에 올린다.
잠든 아내를 향해 조용히 소리 내어 본다.
"여보, 아침 준비 다 했어. 나와서 먹어."
대답이 없다.
아내는 여전히 단잠 속에 있다.
그 평온한 휴식을 깨우고 싶지 않아,
나는 아주 조용히 혼자만의 식사를 마친다.
출근을 위해 현관문을 연다.
어제 밤늦게부터 시작된 눈이 여전히 내리고 있다.
인기척을 느낀 고양이 '레이'가 다가와 몸을 비빈다.
녀석의 사료를 듬뿍 채워주고 차에 올라탄다.
목적지는 연풍 산자락에 있는 기종이네 집.
눈이 오면 길은 위험해지고 차는 미끄러진다.
평소라면 출근을 포기했을 날씨다.
하지만 나는 핸들을 꺾지 않는다.
내가 가지 않으면,
기종이는 온종일 창밖만 보며
나를 기다릴 것이다.
그 간절함을 알기에 와이퍼를 바삐 움직여 눈을 닦아낸다.
산 위 시골길을 돌고 돌아 도착한 마을.
눈이 너무 쌓여 차는 더 이상 나가지 못한다.
차 문을 열자 시린 겨울 공기가 훅 끼쳐온다.
슬레이트 지붕 위로 소복이 쌓인 눈.
길가 가로등은 오늘따라 애잔하게 빛난다.
눈이 내리지 않았다면 캄캄했을 그 길을,
오늘은 하얀 눈들이 등불처럼 비춰준다.
오전 6시 50분.
기종이의 집이 보이기 시작한다.
창문을 열면 내가 걸어오는 모습이 훤히 보일 거리다.
"기종아, 선생님 왔다!"
나를 힐끔 쳐다보는 기종이의 눈빛.
긴 말은 필요 없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얼마나 고마운 존재인지 안다.
그 짧은 눈 맞춤 속에 모든 진심이 녹아 있다.
누군가에게는 고된 출근길일지 모르나,
나에게는 기쁨을 확인하러 가는 길이다.
아내를 위해 남겨둔 따뜻한 온기와
기종이를 향한 설레는 발걸음.
그 두 가지면 충분한,
나의 가장 아름다운 겨울 새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