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보기가 가져온 나비효과
"애호박, 연근, 아! 치즈도요.
월요일 아침, 모자를 푹 눌러쓴 채로 차에 올라타며 일요일 마감 인수인계표를 차례대로 읊는다. 브루펍의 형태다 보니 평일 오전엔 양조, 저녁과 주말엔 바 공간을 운영해야 한다. 그래서인지 주말에 갑자기 몰려든 손님으로 바빴던 탓인지 운전대를 잡은 이의 얼굴은 퀭하다. 터져 나올 것 같은 하품을 속으로 삼키며 창 밖을 바라본다.
광안리에 꿀꺽하우스를 오픈한 지 3 달이라는 시간이 흐른 시점이었다. 100일이란 시간에 누군가의 승진 시험이 끝나고, 계절이 달라지고, 한 생명은 탄생 후 100일 잔치를 맞이하게 된다. 때론 어떤 기적이 일어나기도 하는데 이를 테면 수능 등급이 달라진다던가 신화 속에선 곰이 인간이 되기도 하는 그런 것 말이다. 부지런히 그 소중한 시간을 달려온 팀을 위해 이참에 선물이라도 해야 하나 싶어 통장 잔고를 살핀다. 어 그래, 일단 장이나 보자...
그동안 우리에게 드라마틱한 기적이 일어나진 않았다. 달라진 점은 많았는데 그중에서도 '장보기'가 일상적인 일이 되었다는 것이다. 전만 해도 장을 본다는 건 온전히 '나'를 위한 일이었다. 내가 먹고 싶은 걸 떠올리고 마트엘 가거나 혹은 핸드폰 클릭 몇 번이면 모든 게 끝났다. 나의 장보기는 그렇게 쉽고 간단했다.
그런데 요즘은 다르다. 판매하는 곳마다 어떤 농산물의 품질이 더 좋은지, 가격 차이는 어떤지, 소진되는 속도를 고려해 몇 개나 사고 주말을 대비해야 하는지. 무엇보다 장보기를 하며 나보단 타인의 얼굴을 떠올리는 빈도수가 더 잦아졌다는 것이다. 엄마, 단골집 가게 사장님들은 다들 이 과정을 거쳐 장을 보고 음식을 준비했구나. 장바구니를 펼치면서 잠깐이나마 오랫동안 어떤 일을 해온 어른들을 떠올렸다. 우리도 그만큼의 숙련됨을 가질 수 있을까? 그 시기를 위해 지금의 서툴고 어색한 시간은 꼭 필요할 것이다.
"아니, 사장님. 애호박 하나에 왜 벌써 3천원이에요?"
"허허, 더 오를 거예요."
서툰 것 투성이던 3개월을 지나 조금은 장보기가 익숙해진 요즘에도 여전히 애호박 하나에 씩씩 거린다. 오르락내리락- 달라지는 물가에 기분도 따라 움직이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무조건적인 절망보다는 희망의 질문을 많이 던진다. 그렇다면 새로운 메뉴로 접근을 해볼까? 이건 이런 방식으로 개선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질문에 답을 던지면서 우리의 공간과 기획도 조금씩 개선돼 간다. 애초에 우리가 빚은 술과 함께 간단한 음식만 조리해 내어 드릴 생각으로 설계한 협소한 주방을 올 상반기에는 개편할 계획이다. 그에 따라 음식 메뉴 구성도 조금 달라질 거고, 우리술과 합이 맞는 파트너들과 함께 푸드 팝업도 계획 중에 있다. 무엇보다 오르는 물가와 다르게 매년 떨어지는 쌀의 가치와 가격에 있어서 '양조장'으로써 가져야 할 어떤 책임 같은 것들을 떠올려 본다.
작은 양조장이 무슨. 누군가는 코웃음 칠 일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과연 이 작은 양조장이 세상을 움직일 수 있을까? 아니, '어떻게' 움직일 수 있을까? 장보기가 가져온 나비효과는 우리에게 제법 큰 날개를 달아줬다. 그 덕분에 긴 호흡을 두고 준비하고 있는 프로젝트를 올해가 가기 전엔 꼭 사람들에게 소개할 수 있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