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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는 Mar 28. 2023

나는 섬에서 태어났고 섬으로 자랐다

브런치에 오지 않은 근황

안녕하세요! 문는입니다.

최근에 통 글을 쓰지 못했습니다. 글 마무리 없이 공백이 길어져 구독자분들에게 죄송스러운 마음이 늘 발목을 잡았습니다.


그럼에도 모든 알림을 다 끄고 글을 쓰지 않았던 저의 근황을, 살포시 일기로 알려봅니다.




두 달 전, 아빠의 환갑은 나에게 많은 감정의 소용돌이를 일으켰다. 그즈음 햄릿이 정말 죽이고 싶었던 사람은 삼촌이 아닌 어머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중2 사춘기 때 겪은 아빠의 사고와 가족 해체, 엄마의 희귀병 판정과 수술, 간병을 위한 제주 귀향, 매년 11월이 돌아올 때마다 도망치고 싶었던 답답함, 남미에서의 불운한 사고들, 학원 창업 및 팬데믹 시대, 강제로 내려놔야 했던 시간들.


나름 잘 극복하며 열심히 살아왔다 생각했는데 잃어버린 나의 어린 시절을 보상받고 싶다는 억울함이 삐져나오기 시작했다. 그에 더해 이런 혼란스러움을 느끼는 나의 감정을 제대로 알아주지 않는 주위 사람들에게도 섭섭함을 느꼈다. 왜 내가 내 감정을 설명하고 증명해야 하지?


내가 느끼는 답답함을 벽으로 쌓았다. 나도, 내 가족도, 그리고 나의 절친들도, 모두 섬처럼 느껴졌다.


나는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섬 주변에 바다를 두르고 아주 좁고 긴 다리를 놓았다. 나는 겁이 많아서 좁고 긴 다리를 건널 때마다 매우 조심스러웠다. 언제 삐끗하면 바다로 떨어질지 몰라. 다리가 무너질지 몰라. 이런 나의 과민한 조심성이 벽이 되어 중간중간 톨게이트가 생겼다.


사람은 누구나 약해. 그러니 믿을 수 없어. 나는 스스로 강해져야 해. 어떤 불확실한 일이 닥쳐도 내가 강해져야 해.


그러나 나의 다짐에도 가끔, 나는 감정적으로 무너졌다. 화를 내야 할 때 화를 내지 않았고, 화를 덜 내야 할 때 크게 화를 냈다. 기뻐야 할 일에 기뻐하지 않았고, 일상의 성취와 칭찬에도 소소한 뿌듯함조차 느끼지 못했다.


스스로도 감정조절이 어려운 이유, 남들보다 자주 몸이 아픈 이유를 객관적으로 볼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정신과에 진료 예약을 했고, 지난주 첫 진료와 심리상담을 받았다.


사실 진료를 받기 전까지 너무나 괜찮은 나날을 보냈다. 강박적인 일상을 내려놓고자 혈당 측정을 관두고 채식을 멈추고 자유롭게 먹고 싶은 걸 먹었다. 해야 할 일에 최선을 다했고, 애쓴 만큼 보상으로 여유 시간에는 실컷 게임을 즐기고 독서를 했다.


이렇게 괜찮은데 정신과에 가도 될까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내 신장 속에 남겨둔 결석처럼 언제쯤 또 우울의 감정이 나를 찌를 것이다.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중병을 진단받을 준비를 하고 병원에 갔다.


나의 예상과 달리 나는 우울도 강박도 아닌 불안이 큰 사람이었다. 게다가 일반인들보다 민감도가 커서 테스트용으로 받은 1/4 크기의 약에도 하루종일 메스꺼움을 느꼈다. 단지 1/2알로 증량했을 뿐인데도 피부의 모든 점이 하나하나 곤두서서 가려움증을 느꼈다. 내가 남보다 더 민감한 사람이라는 게 객관적으로 증명됐다.


약의 도움을 받는 것이 꺼려졌는데 일주일 복용한 지금은 약을 복용하는 데 만족감을 느낀다. 불안약을 최소 용량으로 잠자기 전에만 먹는데도 귀가 훨씬 편해졌다. 4층 내 방에서 1층 공동현관문이 열리는 소리를 듣고, 아래층의 말소리가 바로 내 귀 옆에서 지르는 듯한 느낌을 받았던 것 모두 내가 너무 민감해서였다.


그러나 첫 심리상담은 실망스러웠다. 다 내가 아는 말. 20대부터 나를 탐구해 결론을 내린 것을 그저 타인의 입으로 다시 듣는 정도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말을 곱씹을수록 나를 돌아보고 있으니 내가 변하기 위한 초석이었다고 느낀다. 다음 상담이 기다려진다.


내 생각에 나는 초식동물 같은 사람이다. 타고나길 예민한 기질이고 그에 더해 자라온 성장환경이 불안을 증식시켰다. 불안도가 높기 때문에 방어 기제도 세고, 스스로에 대해 엄격함이 크다. 본인에 대한 기준이 확실하고 엄격하기 때문에 타인에 대한 평가도 엄격하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남에 대한 신뢰가 0에서 시작한다. 내가 고립을 자처하고 즐기는 이유다.


다행히 나는 인정 욕구도 큰 사람이라 사회적 가면을 쓰는 데도 능하다고 한다. 그러나 상담 선생님은 그런 나의 행동을 ‘피상적’이라고 했다. 피상적. 수박 겉핥기. 사실 이 부분은 알 것 같으면서도 내심 부정하고 있다. 더 자세히 탐구해봐야 할 부분이다.


제주의 벚꽃을 볼 때마다 곧 사라질 눈요깃거리에 시큰한 행복을 느낀다.


어찌 됐든 상담 선생님의 조언으로 최근 멍 때리기를 연습한다. 비생산적인 느낌에 가만히 몸을 방치해 본다. 생각을 멈추(려고 노력하)고 감각에 집중해 본다.


등에 머무는 햇살의 따가움에 피부가 데이는 걸 느끼고, 곳곳에 피어 눈을 찌르는 분홍 덩어리들의 크기를 가늠하고, 울퉁불퉁한 식물성 스팸을 자르는 칼의 움직임과 손가락에 달라붙은 찰흙 같은 햄 쪼가리들의 끈적임을 느껴 본다.


아직은 어렵다. 나를 완전히 바꾸는 건 큰일이다. 이 일기는 객관적인 척 내 상태를 돌아보고 있지만 사실 매우 사적이면서 주관적이고 부정확하다. 그러나 이 일기가 2주 후, 한 달 후, 두 달 후에는 어떻게 달라질지 모른다. 그저 지금의 생각과 감정에 집중해 보고 내가 느낀 것을 써본다.


이런 경험들 속에서 그래도 난 제법 괜찮은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으니 상담 선생님의 말대로 자신의 ’특별함‘에 빠져 있다. 중병인가 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외면하고 도망치지 않을 것이다. 이번엔 말이다.



3월 28일 화요일,

출근을 미루고 글을 쓰는 여유로움과

조금의 죄책감을 누리면서 쓴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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