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초의 기억 하나
문틈으로 엿본 어른들의 말다툼
와당탕하고
와르르하고
거울 조각이 널브러진 방에서
뜯긴 비디오를 찾았지
내가 좋아하는 호호 아줌마 비디오
엄마가 다음 편을 안 빌려다 주면 어떡하지?
나는 호호 아줌마처럼 작아져서 울었어
태초의 기억 둘
남자애의 손을 잡고 뛰었던 골목길
탓탓탓탓
올려다본 돌담이 높아서 하늘은 시컴하고
좁고 긴 골목길은 끝이 없었지
엄마 울보를 나한테 떠넘기면 어떡해.
손에 쥔 게 너무 무거워서
버리지도 못하고 다리를 끌었어
타아 타아 타아 타아
- 몰명진 놈 같으니
할아버지의 말 한마디에
엄마는 보란 듯이 사내아이를 팼지
하나 둘 셋
매보다 억울함에 목이 메었나
사내애의 울음소리가 커지면
매를 치는 엄마의 몸도 커졌지
나는 매 맞는 사내도 못될 계집이라
손가락을 호잇 휘둘러 소리를 끄지 못하고
열등한 손으로 숫자를 셌지
여덟 아홉 열
그래도 엄마는 메데이아가 아니라
칼은 들지 않았잖아
착한 우리 엄마
천사같은 우리 엄마
- 엄마는 너희 때문에 살아
거짓말
엄마는 메데이아가 되고 싶잖아
우리를 주워서 뱃속으로 집어넣고
꼬메버리고 싶잖아
나는 혐오를 엄마의 눈으로 배웠어
내가 저런 걸 낳았네?
저 징그러운 거
내가 무슨 신벌을 받아서
저런 걸 낳았지?
칼을 들지 못해
메데이아가 되지 못해
불쌍한 우리 엄마
엄마는 그 손을 다른 애에게 줬지
- 너는 그래도 부모가 있잖아
나는 엄마를 뺏겼다
내 옷을 뺏기고
내 지갑을 뺏기고
내 집을 뺏기고
지독한 마녀가 됐다
-너는 애가 왜 그리 욕심이 많니?
어유 저 독한 년
저 징그러운 거
저런 걸 내가 낳았네
너도 너 같은 딸 낳아
엄마 나는 메데이아가 될 수 없어
나는 칼을 들어
분신의 목을 긋는 대신
칼날로 가슴을 자르고
칼자루는 질에 박았어
누구의 여자도 되지 못해
누구의 엄마도 되지 못해
엄마 나는 호호 마녀야
불쌍한 우리 딸
여자의 기쁨도 모르고
남자의 사랑도 못 받고
머리가 다 새 버렸네
불쌍한 우리 엄마
엄마 다음 생엔 내 딸로 태어나
내가 엄마의 메데이아가 될게
사랑해 엄마
우리 평생 같이 살 자 죽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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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너 : <Medea about to Kill her Children> (1862), Eugène Delacroi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