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시 작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문는 Apr 01. 2023

시 05 메데이아

태초의 기억 하나


문틈으로 엿본 어른들의 말다툼

와당탕하고

와르르하고

거울 조각이 널브러진 방에서

뜯긴 비디오를 찾았지

내가 좋아하는 호호 아줌마 비디오

엄마가 다음 편을 안 빌려다 주면 어떡하지?

나는 호호 아줌마처럼 작아져서 울었어


태초의 기억 둘


남자애의 손을 잡고 뛰었던 골목길

탓탓탓탓

올려다본 돌담이 높아서 하늘은 시컴하고

좁고 긴 골목길은 끝이 없었지

엄마 울보를 나한테 떠넘기면 어떡해.

손에 쥔 게 너무 무거워서

버리지도 못하고 다리를 끌었어

타아     타아    타아     타아


- 몰명진 놈 같으니

할아버지의 말 한마디에

엄마는 보란 듯이 사내아이를 팼지


하나 둘 셋

매보다 억울함에 목이 메었나

사내애의 울음소리가 커지면

매를 치는 엄마의 몸도 커졌지


나는 매 맞는 사내도 못될 계집이라

손가락을 호잇 휘둘러 소리를 끄지 못하고

열등한 손으로 숫자를 셌지

여덟 아홉 열


그래도 엄마는 메데이아가 아니라

칼은 들지 않았잖아

착한 우리 엄마

천사같은 우리 엄마


- 엄마는 너희 때문에 살아


거짓말

엄마는 메데이아가 되고 싶잖아

우리를 주워서 뱃속으로 집어넣고

꼬메버리고 싶잖아


나는 혐오를 엄마의 눈으로 배웠어


내가 저런 걸 낳았네?

저 징그러운 거

내가 무슨 신벌을 받아서

저런 걸 낳았지?


칼을 들지 못해

메데이아가 되지 못해

불쌍한 우리 엄마

엄마는 그 손을 다른 애에게 줬지


- 너는 그래도 부모가 있잖아


나는 엄마를 뺏겼다

내 옷을 뺏기고

내 지갑을 뺏기고

내 집을 뺏기고

지독한 마녀가 됐다


-너는 애가 왜 그리 욕심이 많니?


어유 저 독한 년

저 징그러운 거

저런 걸 내가 낳았네

너도 너 같은 딸 낳아


엄마 나는 메데이아가 될 수 없어


나는 칼을 들어

분신의 목을 긋는 대신

칼날로 가슴을 자르고

칼자루는 질에 박았어


누구의 여자도 되지 못해

누구의 엄마도 되지 못해


엄마 나는 호호 마녀야


불쌍한 우리 딸

여자의 기쁨도 모르고

남자의 사랑도 못 받고

머리가 다 새 버렸네


불쌍한 우리 엄마

엄마 다음 생엔 내 딸로 태어나

내가 엄마의 메데이아가 될게

사랑해 엄마


우리 평생 같이 살  자 죽자



230330


배너 : <Medea about to Kill her Children> (1862), Eugène Delacroix

매거진의 이전글 시 03 도로 공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