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또 한 겹 쌓이는 엄마아부지의 결혼기념일 -
그해 눈 내리던 겨울의 어느 날, 염천교 사진관에서 일하던 총각과 공부하기 싫어 친구들과 영화 보러 다닌 처녀가 만나 결혼했다. 내가 살아본 시기는 아니지만 지금보다 훨씬 추웠음은 이들의 이야기로 짐작할 수 있다. 추위가 심해 서로 따뜻해지려고 결혼했을 텐데... 인물 훤한 신랑과 아담 사이즈의 신부는 초장부터 따뜻하다 못해 따끔거릴 만큼 뜨거웠다. 너무 다름을 너무 이해하지 못해서.
내가 아끼고 사랑하는 그러면서도 툴툴거리게 되는 울 엄마아부지 얘기다.
어렸을 때부터 두 분은 참 자주 싸웠다. 주된 원인은 늘 아부지였다. 술 많이 마신다고 화투 좋아한다고 일요일마다 조기축구 나간다고 엄마는 날카로운 잔소리를 쏟아냈다. 잘못한 걸 아는 아부지는 늘 아무 말도 없이 듣기만 하다 수위가 높아진다 싶음 휑하니 밖에 나가 버렸다. 지금만큼 내가 어지간한 걸 이해했다면 지금처럼 휴대폰이 있었다면 바로 아부지에게 약간의 코치를 했을 텐데. 엄마의 뼈 있는 말은 나한테 관심 좀 가져달라는 사인이었다는 것을. 하긴 나 역시 세월이 많이 흘러 알게 되긴 마찬가지다.
참 아이러니했다. 그렇게 싸우면서도 남편 끼니는 꼬박꼬박 챙기는 엄마의 양가적인 감정과 행동이 말이다.
"아니 그렇게 욕할 거면 이혼하면 편할 것을!"
"니 아부지 밥은 어쩌고"
이혼보다 남편의 밥이 먼저인 것이 바로 엄마였다. 복잡하고 미묘한 그러면서도 밥으로 귀결되는 엄마식 사랑(정)을 아부지는 잘 간파하고 있었다 보다. 한마디로 믿는 구석이 있었던 게지.
아부지가 큰 교통사고로 생사의 갈림길에 놓였을 때도 위암수술 후 하루 6번의 식사준비가 필요했을 때도 엄마는 같은 자리를 지켰다.
켜켜이 쌓인 노고를 그리고 정성을 알기에 팔십 대 후반의 남편은 매일 낮 인쇄소에서 일하다 아내에게 전화를 한다. 점심 먹었냐고. 아직 안 먹었음 얼른 먹으라고. 그리고 뚝 끊는다. 이건 아부지식 사랑 표현이다.
살면서 서로 닮아 간다지? 하지만 닮는다기 보단 그냥 그러려니 하며 사는 듯한 이 노부부.
소주와 담배 없이 못 산다는 남편의 취향을 존중하는(어쩌면 포기일 수도) 아내, 시집살이 한 과거 이야기를 반찬으로 곁들이는 아내의 잔소리를 묵묵히 들어주는(어쩌면 귀를 닫고 딴생각을 하는 것일 수도) 남편의 노하우(?)가 신기하고 경이롭다.
세상물정 몰랐던 이십 대의 팽팽한 모습은 사라지고 아부지도 엄마도 쭈글쭈글한 주름 속에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모진 풍파 다 겪고 이젠 두 양반이 여유 있게 부드럽게 사실 만도한데 싸움은 끝나지 않는다. 차이가 있다면 옛날보다 농도가 묽고 물렁해졌다는 거.
난 두 분의 생신보다 결혼기념일을 더 챙긴다.
서로 다른 두 사람이 만나 평생을 같이 하고 그렇게 싸우면서도 자식을 셋씩이나 낳고 새로운 역사를 썼으니 얼마나 위대한지.
(지난주 금요일) 이번엔 근사한 한정식집을 예약했다. 얄팍하지만 용돈도 드렸다.
"세상에 같은 날 태어나고 같은 날 가는 게 젤 어려운 거다. 기분 좋게 살자" 아부지의 말이 귓전에 계속 맴돈다. 주책맞게 그 순간 왜 눈물이 났는지 모르겠다...
띠리릭 남편이 문 여는 소리가 난다. 배고프단다.
'오늘은 토요일이니 우리 남편 좋아하는 토스트 해줘야지~'
이게 엄마가 나에게 알려준 가장 큰 부부생활 노하우란 걸 느껴가고 있는 요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