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적인 것도 이타적일 수 있나
혼자 살아가기
'나의 존재 이유는 무엇인가.' 꽤 오랫동안 이 질문을 마음에 품고 살았어요. '나는 왜 태어났고,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며, 내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정해진 바 없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부지런히 도 살았군요. 고등학교 때부터 봉사라는 이름의 활동을 꽤 꾸준히 찾아서 했어요. 봉사로 인해 타인의 삶이 조금이라도 나아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고등학교 때에는 매주 독거노인 할머니 댁에 방문해서 간단한 청소와 끼니를 차려 함께 식사를 하고 돌아왔어요.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봉사 그 자체에 대한 순전한 마음과 함께 스스로가 조금이라도 나은 인간임을 증명하고 싶었던 것 같기도 해요. 어쩌다 보니 동아리 회장까지 하게 되었지만(가위바위보!) 사명감이 있어서 한 것은 아니었고, '나중에 생활기록부에 적을 한 가지는 있겠다.'라고도 생각했어요.
대학에 가서도 꾸준히는 못했지만 일회성의 활동들을 찾아서 하곤 했어요. 2007년, 태안에 기름이 유출되었다는 소식에 가슴이 너무 아팠어요.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았어요. 혼자서 참여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다가 누구라도 같이 가면 좋을 것 같아 당시 속한 기독교 동아리에서 사람을 모았어요. 몇 명 모이려나 싶었는데 반나절도 안되어 40명 정도의 사람들이 함께 가겠다는 의견을 전해왔어요. 삼삼오오 모여 가벼이 다녀오려 했는데 큰 규모의 이벤트가 되어버렸어요. 버스 대절, 김밥과 간식, 물 등의 식량 주문, 일정 공유 등과 같은 일련의 일들이 단 하루 만에 이루어졌어요. 개인적으로 사람들을 모았지만 그래도 이렇게 단체가 되었으니 담당 목사님께 허락(허락의 모양새였지만 통보였다)을 구했지요. 다음날 아이러니하게도 기독교 동아리가 속해 있는 교회에서 허락이 떨어지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어요. 다음 주말로 예정된 행사를 준비 중인데 먼저 가면 서로 번거로우니 갈 생각이 있는 청년들은 그 행사에 참여하라 하셨지요. 담당 목사님은 이를 전하면서 난처한 표정을 지으셨으나 '간곡히' 양해를 구하고 다녀왔어요.
"부디, 반나절만에 참여의사를 밝힌 이 청년들의 열정을 꺾지 말아 주세요."
돌이켜보니 당시의 저는 너무나 열정적이었네요. 자연이 훼손되었다는 소식에 가슴이 미어졌고 당장 내일모레 떠나야 하는 일정에 함께 하자며 손을 잡아준 사람들의 마음에 무척이나 감동했어요. 그리고 그들의 마음을 지켜야만 한다고 생각했어요.
조금 더 솔직하게 스스로에게 물어볼게요. 저는 정말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자연보호, 타인의 마음'만을 위해 다녀왔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요. 두 활동이 자연보호를 취지로 이루어졌다는 데에는 변함이 없으니 교회에서 허락이 떨어지지 않았을 때 적당한 핑계를 대고 그 행사에 참여를 독려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요. 어쩌면 사람들의 마음을 위한다는 것은 명분일 뿐, 스스로 사람들을 모으고 기획한 것을 일정대로 추진해 나가고자 하는 나의 근성을 드러내기 위함은 아니었을까요. '나는 이렇게 자연도 사랑하고, 같은 마음의 사람들을 모아서 다녀오는 기획력도 갖출 수 있다'는 우월감을 드러내고자 하는 마음이 과연 없었을까요. 실제로 저의 행동력과 추진력을 칭찬해주는 사람들의 말에 무척이나 뿌듯함을 느꼈지요. 칭찬을 갈구하는 삶이 피곤하지는 않았을까 싶어요. 그럼에도 20대의 저는 나만의 역할을 찾기 위해 여기저기 기웃거리고 있었어요.
한 때는 타인을 위한 삶을 살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조금 더 정확히 말하면 타인을 위한 삶을 살아야만 한다고 생각했고 그것이 내 존재 이유를 설명해줄 수 있으며 존재 가치를 높여줄 것이라고 믿었어요. 참 열심히도 살았네요. 봉사활동도 많이 하고, 여러 공동체를 위해 헌신도 해보고, 신앙에도 기대어 보았지요. 그런데 저 숱한 시간을 지나오며 타인을 위한 삶을 살아보겠다던 제가, 지금은 '타인을 위한 삶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생각한답니다. 모든 행위는 결국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을 인정하기로 했어요. 겉으로는 타인을 위해 하는 행동처럼 보일지라도 모든 거추장스러운 껍질을 벗기고 벗긴 알맹이에는 개인의 어떤 욕망이 꽈리를 틀고 앉아 있다고 여기게 되었어요. 누군가는 반문할 수도 있겠지요. "봉사도 하고 그로 인해 나의 보람도 느끼면서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 것은 타인을 위한 것이 아닌가?", "하나님을 위하는 삶을 살다 보니 세상에도 선한 영향력을 끼쳤고 그것은 나에게도 좋은 삶이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나만을 위한 삶이었나?" 그럴 수도 있죠. 그러나 이것은 '닭이 먼저니, 달걀이 먼저니'와 같은 상투적인 논쟁과도 같아요. 그저 각자가 바라보는 세상에 대한 시선일 뿐이에요. 저는 그냥 스스로에게 솔직하고 싶어요. 선한 행동이라 일컬어지는 것 이면에는 나의 욕망이 있었노라고. 그러니 내가 당신을 위해서 한 것이 아니라 내가 살기 위해 선택한 것이라고.
지금은 내가 왜 존재하는지에 대한 질문도 그만두었어요. 이제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해요. 지금 여기 앉아서 나를 내가 잘 돌보고,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 솔직한 내면의 털을 어루만져주기로 해요. 내가 나의 목소리를 들어주고 스스로 가장 편안할 수 있는 선택을 할 때, 비로소 느끼는 행복이 온전할 때, 가까운 사람에게 선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고 믿어요. 어쩌면 타인을 위하는 '이타'와 나를 위하는 '이기'는 대치의 상태가 아니라 동전의 앞뒤면 처럼 함께 나아가야 할 지점일지도 모르겠군요. 나를 위하는 것이 당신을 위하는 것이고, 당신을 위하는 것이 나를 위한 것이며 우리 모두를 위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너무 이상적이려나요. 제가 생각하는 이타심은 그런 것이에요. 나의 이기심으로 내가 온전할 때 전해지는 행복. 우리 모두는 어깨동무를 하고 서 있어요. 함께 서 있는 이들에게 기대어 무거워지지 않기 위해 두 발 굳건히 서 있을 거예요. 나의 행복이 우리의 행복이라 굳게 믿으면서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