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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eneon Mar 08. 2020

14세 소녀가 쓴 탱고곡

Rosita Melo - Desde el alma (1911)

[3월 8일 세계 여성의 날을 축하하며-]

 


1. 탱고는 마초적이다?


지구 반대편.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아마추어 뮤지션들에 의해 탄생한 탱고. 간단한 코드 서너 개로 이루어진 이 음악은 금세 사내들의 귀를 사로잡았다. 도시 외곽의 노동자들부터 도시 중심부의 부르주아 패거리까지. 사내들은 '신분 차이'마저 잊은 채 밤새 노래하고, 춤추고, 술 마시고, 싸웠다.

탱고의 인기가 높아지는 만큼, 사내들 사이의 싸움도 잦아졌다. 그들은 쓸데없는 시비가 붙어서, 또는 여자 하나를 사이에 두고서 서로 치고박았다. 술에 잔뜩 취한 이들이 싸우는데, 상황이 멀쩡하길 바란다면 그건 판타지다. 그릇이 하나라도 깨지지 않고 지나가는 밤이 없었으며, 사람이 죽어나는 일도 허다했다.

탱고는 곧 부랑배들의 음악이라는 오명을 얻었다. 공연장에선 뮤지션들에게 탱고를 연주하지 말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 막 번지기 시작한 탱고의 인기는 사그라들 기미가 안 보였다. 사람들은 길거리의 배럴 오르간 앞에 모여 춤을 추었다. 마치 춤을 잘 추는 사람이 사랑을 쟁취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아니나 다를까, 탱고는 '여자의 사랑을 얻기 위한 남자들의 춤'으로 처음 발전했다. '순정마초'라는 제목은 그러고 보면 아주 생뚱맞은 얘기는 아닌 것이다.


Street Barrel Organ, 이동식 주크박스 같은 것. 유럽에선 아직도 길에서 종종 볼 수 있다.




2.  탱고는 마초적이지 않다?


탱고 춤이 남성들에 의해 발전했던 것처럼, 탱고 음악도 남성에 의해 발전했다. 카를로스 가르델과 훌리오 데카로. 트로일로와 피아졸라.. 유명한 뮤지션의 99%는 남성이다. 간혹 탱고 가수 중에 여성이 인기를 끈 적이 있긴 해도, 그들 중 누구도 가르델 같은 명성을 누리진 못했다. (물론 아르헨티나의 국민가수, 메르세데스 소사 Mercedes Sosa가 있긴 하지만 그녀는 탱고만 부른 게 아니기에 논외로 한다.)


하지만 탱고가 마초적이라는 말이 곧, 탱고가 남성의 음악이란 얘기는 아니다. (탱고가 금지되어) 갈 곳 잃은 뮤지션들에게 공연 장소를 제공한 건 부잣집 마나님들이었고, 배럴 오르간 앞에 옹기종기 모여 음악을 듣던 것은 젊은 아가씨들이었다. 그들은 남성들과 함께 탱고 춤을 추었으며, 탱고 가사의 주인공이 되기도 했다. 여성 뮤지션의 입지는 늘 좁았지만, 글쎄. 여전히 세상에서 가장 사랑받는 탱고 발스(왈츠) 곡의 작곡가는 여성이다.




3. 14 소녀가  탱고곡 


Nelly Omar - Desde el alma




열네 살쯤 된 한 소녀가 피아노 앞에 앉아있다. 그녀는 자신의 손가락을 건반 위에 조심스레 올려두고, 즉흥적으로 건반을 누르기 시작한다. 마치 소녀의 꿈처럼 아름답고 로맨틱한 멜로디의 왈츠곡이 흘러나온다.... 시간이 흘러, 이 곡은 가장 대표적인 탱고 발스 곡이 되었다. 이 아름다운 멜로디를 들어보면 너무나 당연한 결과가 아닌가 싶다. 곡의 제목 그대로, 소녀의 맑은 "영혼으로부터 Desde el alma" 만들어진 곡이기 때문이다.


피아노 위에서 손가락을 춤춘 이 소녀의 이름은 로시타 멜로 Rosita Melo. 로시타는 우루과이의 몬테비데오 출신으로, 세 살 때 가족과 함께 부에노스아이레스로 이사를 가 그곳에서 평생을 살았다.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음악에 재능을 보였다. 네 살 때 이미 듣는 곡마다 피아노로 연주할 줄 알았다고 한다.

로시타는 학창 시절에 음악을 체계적으로 배웠으며, 졸업 이후엔 대학에서 피아노 교수로 재직했다. 그녀는 탱고와 클래식, 팝 음악 등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활동을 했고, 8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세상을 떠났음에도 여전히 Desde el alma의 작곡가로서 기억되고 있다.



마초적이기 그지없다고 여겨지는 탱고인데, 가장 유명한 곡 중 하나가 십 대 소녀가 쓴 왈츠곡이란 게 난센스다. 하지만 그냥 우연히 일어난 일은 아닐 것이다. 아니, 우연히 일어났다고 하더라도. 의미 없는 일은 아닐 것이다. 적어도 그녀의 작곡 일화는 100년도 훨씬 흐른 지금의 탱고 여성 뮤지션에게 귀감이 되니까 말이다.

2020년 현재에도 "나는 피아졸라 곡을 여성이 (반도네온)으로 연주하는 건 상상도 해본 적 없는 일이야, "라든지 "남자답게, 파워풀하게 연주해봐."라는 말을 심심찮게 듣곤 한다. 탱고의 강한 스윙, 반도네온의 강한 사운드. 그런 게 다 마초적이란 것이다.

어디서부터 지적해줘야 할지 감도 안 오는 성차별과 선입견. 나는 그런 말을 하는 이들의 입을 틀어막기보다, 로시타 멜로의 곡으로 귀를 틀어막아주고 싶다. 백문이 불여일청이라고. 탱고는 (소위) 남성성으로만 이루어진 음악이 아님을 좀 알라고 말이다.



4. 탱고는 그저- 함께하는 것


당연하지만 여성의 곡이 더 위대하다거나, 탱고가 가진 남성성을 부정하겠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다. 세상의 다른 모든 예술이 그러하듯이, 탱고도 다양성을 통해 발전한다. 가령 로시타 멜로가 작곡한 Desde el alma의 경우에도, 호메로 만지 Homero Manzi라는 시인의 가사가 더해져 더 아름다워졌다.

곡이 발표되고 한참 뒤인 1948년. 로시타는 기존에 자신의 남편이 쓴 가사 대신 시인 만지가 쓴 가사를 곡에 덧붙였다. 이후 Desde el alma가 전 세계적인 인기를 끌게 된 데는 아름다운 새 가사가 한몫했다.


Alma, si tanto te han herido porque te niegas al olvido
Porque prefieres llorar lo que has perdido
Buscar lo que has querido Llamar lo que murio

영혼아, 너는 그렇게 아파하면서 왜 잊으려 하지 않는 것이냐
왜 너는 네가 잃어버린 것을 위해 울고,
네가 원했던 것을 찾고, 이미 죽어버린 것을 부르길 바라는 것이냐.


이 곡이 유명한만큼, 수많은 밴드가 입맛에 맞게 편곡해 연주를 했다. 그중엔 여성 보컬과 함께한 버전도 있고, 가사 없이 연주곡으로 된 버전도 있고-  연주된 모양이 아주 다양하다. 탱고 리스너들 사이에 유명한 건 피아니스트 오스발도 푸글리에세Osvaldo Pugliese의 오케스트라 버전이 아닐까 싶은데..


Osvaldo Pugliese - Desde el Alma (Teatro Colón 1985)


푸글리에세 오케스트라의 편곡은 대게 엄청 리드미컬하다. 반도네온을 무릎으로 부수려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파워풀하다. 소위 말해 마초적이다. 하지만 이들이 연주한 desde el alma는 섬세하기 그지없다. '소녀의 감성'으로 연주하고 있다. 듣다 보면 이런 생각이 든다. 마초적이다 아니다, 남성적이다 여성스럽다- 그런 걸 구분하는 게 다 뭔 소용이 있나. 구분하는 것보다, 반대 성향을 수용하는 게 더 중요한 거 아닌가.


역사가의 관점으로 볼 때 탱고는 마초적이다. 그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 하지만 남성의, 남성에 의해, 남성을 위해 만들어진 장르는 아니다. 입지는 좁아도 여성 뮤지션은 늘 존재했으며, 그들은 탱고의 사운드를 더 풍성하고 다양하게 만들어줬다. 최근 들어 탱고 여성 뮤지션이 많아진 건 기쁜 일이다. 여성이 연주하는 피아졸라로, 푸글리에세로. 탱고는 앞으로 100년도 끄떡없으리라고 기대한다.





덧1.

로시타 멜로의 남편은 시인 빅토르 퓨마 벨레즈Victor Piuma Vélez 였다. 그들은 늘 함께 작업했다. 이를테면 로시타가 곡을 쓰면 빅토르가 가사를 입히는 식으로. Desde el alma역시 마찬가지였다. 곡이 발표되고 몇 년 후 빅토르가 가사를 붙였다. 하지만 그 가사를 로시타는 그리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고...

이후 호메로 만지가 이 곡을 <불쌍한 나의 엄마>라는 영화에 쓰고 싶다며 로시타에게 연락을 했는데, 로시타는 그 제안을 수락하면서 가사도 새로 써달라고 요청했다. 그렇게 하여 만들어진 게 1948년 버전 가사이다. 덕분에 이 곡 소개에는 작곡가 로시타 멜로와 더불어 두 명의 작사가 이름이 함께 붙는데, 빅토르가 쓴 가사는 그리 유명하지 않은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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