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그 여백 21
- 비워진 것들의 무늬
잠蠶
빈집에서
소나기 쏟아지는 소리가 난다
쏴아~
게송 한 잎 반야 한 잎
갉아 먹는 소리들이 푸르다
우화를 위해
고요를 젓는 꼿꼿한 자세는
업처럼 질긴 실올 뽑아
생애 단 한 채 집을 짓는 일
사몽四夢의 잠 속에서 몸을 접고
면벽 좌선하는 것이다
모든 것은 다 지나고 나면 공空일 뿐
날개를 얻었으나 날지 않는
저 무심한 좌화坐化
다 비우고 나서야 남기고 가는
빈 절집 한 채
견繭
갉아 먹던 잎맥에서 실을 뽑아
나를 덮는다
허공에 지은 집은
내 안에서 자란 나의 흔적
염화미소 한 줄 강물에 흘러간다
벽 하나 세우는데
삼천 겁의 침묵이 필요했다
등燈
나의 지혜는 바람에 흔들린다
장경각 처마 끝에 걸린
불빛 하나가
온 암자를 밝혔다
번뇌 위에 먼지처럼
쌓이고 쌓인 시간
꺼질 듯, 다시 살아나는
입정入靜의 기도
이 불을 끄는 자는 누구인가
이 불을 지키는 자는 누구인가
우羽
날개를 얻었다
벗어나려면 단 한 번 퍼덕이면 되는 일
그러나
나는 허공을 접는다
날아오르지 않고
떠오르지 않고
그저 앉아 있을 뿐
무소의 뿔처럼 깃을 털고 있다
회灰
깃털에 불이 닿았다
타오르지 않는 불 말하지 않는 불
나는 불타고 사라졌다
재는 흩어지지 않았다
고요는 고요했다
누가 나를 태웠는가
누가 이곳에 남았는가
남은 것은
색도 아니고 형상도 아닌
사리도 없이 사라진
나의 고요
각殼
옛집에 들렀다
내가 나를 두고 떠난 자리는
비어 그대로인데
짙은 향냄새가 고여 있다
조아리는 묵언은 벽에 남아
고치처럼 투명해진 문
나는 여기에 있고
나는 여기에 없다
남기고 가는 건
빈 껍질 하나
몽夢
1
물속에서 어머니의 등을 밀었다
그 등 위에 등불 하나 켜져 있었다
2
내 입에서 실이 흘러나왔고
입을 다물 수 없었다
3
길 없는 길 위에 고치가 흘렀고
그 안에서 내가 나를 삼키고 있었다
4
날개가 돋았으나 날지 앉았다
사몽四夢이 지나고
눈을 떴을 때
나무 위에 빈 집 한 채
나의 후생이었다
# 시집 『 비워진 것들의 무늬 』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