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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로파 May 21. 2023

느린 골목을 걸으면

사직동엔 미뤄둔 고민을 현재에 돌아보게 하는 힘이 있는 것만 같다. 바깥의 속도가 덜 스며들어서일까. 조용하게 한옥 담을 왼편에 끼고 걷다 보면 수면 아래 있었던 생각들이 떠오른다. 바빠서 잊고 있었던 생각들. 잠시 멈춰 가만히 바라보면 선명해지는 생각들. 그래서 사직동의 이름은 토지와 곡식의 신을 뜻하는 한자(社稷)를 합쳐 만들었다지만 내게 사직동은 ‘생각할 사(思)’를 쓰는 사직동이다. 귀에 이어폰을 꽂고서 사직동을 걸었다.


그렇지만 내게 사직동은 ‘생각할 사(思)’를 쓰는 사직동이다.


사직동 마을 입구에 들어서면 거대한 나무가 맞이한다. 겉면은 까맣게 보일 만큼 짙은 갈색의 껍질이 단단하게 둘러쌌다. 그렇지만 나무 크기에 비하면 작은 나뭇잎 수십만 개는 콩알같이 새파랐다. 나무 아래 작은 블록에는 할머니가 앉아 있었다. 할머니 발치에는 개가 약간 지쳐 엎드려 있었다. 매일 비슷한 시간에 함께 걸어가다 잠시 쉬어갈 두 존재의 모습이 그려졌다. 어제도 오늘도, 지난해에도 그랬을 것 같은 모습이었다. 어떤 삶이 있어든 오늘의 다정한 구도가 묘하게 위로가 됐다.


의자 위에 앉아서 케이크를 바라보는 참새


마을 입구의 큰 나무를 지나 골목을 오르락내리락하다 보면 카페가 나온다. 어쩐지 참새가 많은 이 카페에선 마당에서 빵을 먹는 사람이 있으면 주변에 참새 열 마리쯤이 모여 힐끗거린다. 혼자서 말차 파운드케이크라도 시키면 참새들의 셀레브리티가 된다. 그렇게 내 앞의 의자 등받이를 꼭 붙잡고 고개를 이리저리 흔드는 참새를 한 장 찍었다. 마당의 흙에 목욕하거나 바닥에 앉아서 조는 참새들을 보다 보면 ‘뭐가 중요한가, 저 정도면 됐지‘하는 생각이 들며 슬며시 웃음이 난다.


사직동은 흑백 필름 카메라로 담았을 때 비로소 그 모습이 드러난다.


카페에서 나와 작은 골목을 헤매다 어느 집 앞의 돌하르방을 만났다. 제주도도 아닌데 웃으며 집 앞에 자리한 돌하르방은 머리에 풀이 나 있었다. 현무암은 거칠거칠하지만, 구멍이 많이 나 있어서 구멍 사이로 풀이 돋았다. 구멍 사이에 드나들었던 바람과 햇빛을 상상했다. 날아다니다가 구멍 사이로 떨어졌을 어느 야생화의 씨앗도. 풀은 어디에서든 여름에는 무럭무럭 자라나 초록을 드러낸다.


머리에 풀이 난 돌하르방


어느새 체부동까지 내려와 ‘성결교회’와 ‘다락 만성당’을 지나쳤다. 오래되어 때가 탈수록 더 고풍스러워지는 벽돌 건물처럼 쌓인 것에는 일정한 아우라가 생긴다. 미래를 바라보되 그렇다고 과거를 무가치하다고 여기지 말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체부동 골목에서야 상사와 주고받았던 대화가 다시금 떠올랐다.


“이쪽 업계는 자격증이 없으면 자리가 없지. 나이가 들면 특히 더 서러워.”


상사가 무심코 던진 한마디였다. 사실 일을 시작했을 때부터 알고 있었지만 정신없이 일하다 보니 고민할 시간조차 없었다. 그렇게 6년이 지난 후 같은 이야기를 들었는데 나는 여전히 자격증이 없었다. ’열심히 산 줄 알았는데 남들 하는 만큼도, 그것보다도 덜 했구나 나는.’ 이력서에 쓸 한 줄의 경력과 미뤄둔 감정들만 내 뒤에 뭉쳐 있을 뿐이었다.


뭉친 걸 먼저 풀어내야 자격증이든 뭐든 달려들 힘이 날 것 같았다. 그래서 사직동을 걸으며 하나하나씩 뭉쳐낸 걸 풀어내려 했다. 마치 수십 장이 겹친 셀로판지를 한 장 한 장씩 떼어내어 정확한 색깔을 바라보는 것처럼. 6년 치의 뭉치는 끝이 없는 것만 같다. 그럼에도 해야 할 일을 하기 위해 또 사직동으로 나선다. 흔들리는 삶을 다시 굳건히 다잡기 위해. 늦는 것들이 모여드는 동네로 오래오래 남아줬으면 하는 마음이다. 오랫동안 낡아가면서 말 없는 위로를 주는 곳으로.


융진, <걷는 마음>

잡을 수 없는 지난 날처럼 쏜살같이 사라져
그 누구도 위로 못 할 이 마음 속을 헤매이네
어디로 가는지 알아도 달라질 건 없네
무심한 척 걷는 이 길 위에선
흘러내리는 눈물 따위 티내진 말아야지
그 누구도 위로 못 할 이 마음 속을 걷고 있네
헤매이네 떠오르네 또 걸어가




독립책방 독서관에서 연재한 여행 에세이입니다. (연재 링크)

다음 편은 얼음눈이 내리는 도쿄로 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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