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4일
아무래도 나무가 쓰러진 소리 같다. 이어 하늘이 갈라지는 소리도 난다. 올해 남반구의 겨울은 이렇게 요란하게 시작되려나보다. 에이미는 현관 앞에 서서 장화와 슬리퍼를 사이에 두고 고민하며 휴대폰에서 스팸 메시지와 광고 메시지를 하나하나 지운다. 천둥번개가 치고 폭우가 쏟아져도 이방인에게 잊지 않고 꼬박꼬박 문자 메시지를 보내는 건 휴대폰 요금 고지서를 보내는 통신사와 스팸 업체뿐이다. 그러다 문자 하나가 눈에 띈다. 안녕, 에이미, 너의 이력서 잘 받아보았어, 로 시작하는 문장이다. 지금까지 이백 장이 넘는 이력서를 내고 다녔지만, 이렇게 친절히 문자까지 받은 건 처음이다.
그날은 그 해 처음으로 41도까지 오른 날이었다. 호기롭게 이력서를 들고 집에서 가까운 상점가부터 찾아다녔다. 아이 엠 루킹 포 잡, 아이 엠 루킨 포 잡을 주문처럼 웅얼거리며 어느 카페 앞에서 한참을 서성거리다 결국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그날이 에이미가 이 나라에 와서 처음으로 운 날이었다. 첫 이력서를 내기까지 일주일이 걸렸고, 일하지 않는 인간으로 두 계절을 보낸 뒤에야 받은 첫 문자였다.
6월 5일
에이미는 비를 피해 공장 처마 밑에 섰다. 날카로운 비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머플러를 제대로 여미다가 아침에 뿌린 향수 냄새를 흐릿하게 맡았다. 모처럼 큰 맘먹고 산 거라 특별한 날에만 아껴서 쓰는 것이다. 면접은 성공적이었다. 항공사에 빵을 납품하는 공장으로, 사장은 중국계 호주인으로 이름은 샤넬, 에이미와 동갑인 젊은 여성이다. 찹쌀떡처럼 고운 흰 피부에 먹물처럼 까만 눈동자와 사과 같은 입술이 한 폭의 동양화 같은 얼굴이다. 구찌 구두 뒤축을 꺾어 신은 그녀가 사무실로 안내했다. 그녀의 발자국이 에에미가 잘 아는 향수 냄새를 진하게 남겼다.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한다. 아까부터 구둣속으로 비가 새들어와 시린 발가락에 힘을 줬다 풀어가며 움직여본다. 에이미는 너무 반듯해서 어색한 구두를 한참 내려다보았다. 비가 쉽게 그칠 거 같지 않다.
6월 6일
존이 여름바다 같은 얼굴을 하고선 봉투를 들이민다. 셔츠 두 벌이 담겨있다. 반 년동안 두세 시간만 자며 두 사람 몫의 의식주를 책임진 고된 얼굴에 모처럼 햇살 같은 기쁨이 비친다.
6월 8일
문고리에 걸어둔 셔츠를 입고 이틀간 신문지를 똘똘 구겨 넣어 말린 구두를 꺼내신고 여권을 챙겨 나섰다. 파트타임 계약서에 아직도 낯설고 아득한 영어 이름을 정성스레 적었다. 사무실 창가 너머 우산도 쓰지 않고 깔깔 거리며 이 빗속을 지나가는 여학생들의 웃음소리가 넘실거린다.
6월 13일
셔츠 목둘레를 따라 누런 때가 자리잡기 시작한다.
장미꽃이 그려진 하늘색 플라스틱 대야에 세제를 풀고 셔츠를 불린다. 호주에서 거주하는 한국인들이 운영하는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무료 나눔 할 때 받아온 대야다.
대야를 뒤집어 의자 삼아 구부정하게 앉아서 목깃을 비벼댄다. 날이 궂어서 빨래가 늘 걱정이다.
6월 25일
'켱진!"
샤넬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공장 전체를 가득 채웠다. 그날 이후로 샤넬은 에이미라는 이름이 너에게 어울리기나 하냐는 듯, 그녀의 원래 이름, 경진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분명 10이었다. 몇 번이나 확인하고 또 확인했는데 왜 경진의 눈에만 10으로 보였을까. 내내 에이미를 못 미더워하던 샤넬이 그날 다시 한번 확인하지 않았다면 어느 항공사 승무원은 지금 하늘 위에서 파이 열 개가 달랑 들어있는 상자를 열게 됐을 테다. 그날 이후로 이 낯선 땅에서 에이미의 진짜 이름이 불리는 유일한 순간은 하필, 샤넬이 에이미를 찾을 때뿐이었다.
7월 10일
에이미는 자신의 인상을 한 편의 드라마라고 친다면, 빨리 감기 버튼을 눌러서 결말부터 먼저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공장 처마 밑에서 에이미는 이번 주 스케줄표를 들고 비가 그치기를 기다렸다. 같이 일하는 릴리와 수지, 제이의 이름 옆에는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다섯 칸에 시간이 적혀있었다.
유일하게 시간이 줄어든 사람은 에이미뿐이었다. 에이미의 화요일과 목요일 칸은 비어있었다. 에이미가 하는 일은 공장 사무실 의자에 앉아 엑셀 파일에 숫자나 입력하고, 출력해서 각 파트 책상 위에 주문서를 올려놓는 거였다. 문제는 수시로 주문이 바뀌고 그 주문을 전화로 다시 확인하는 데 있었다. 상대방의 말을 못 알아들어서 pardon 하는 순간, 저쪽에서 들리는 한숨소리는 에이미의 귀를 아예 마비시켜 버렸다. 옆에서 내 입술만 뚫어지게 쳐다보던 샤넬은 한숨을 크게 쉬며 수화기를 거칠게 뺏어 들었다. "켱친!" 샤넬은 자기를 한국사람이 가득한 공장에 데려다 놓아도 켱친보다 훨씬 일을 완벽하게 할 수 있을 거라고 말했다. 에이미는 모국어라는 껍데기가 벗겨진 민낯과 이렇게 정면으로 마주치게 되는 날이 언젠가 올 거라 각오는 했었다. 그렇게 마주친 에이미의 민낯은 생각보다 더 추레했다.
7월 13일
오늘도 비가 온다. 경진은 밤새 비가 내리고 난 다음 날 아침의 싱그러운 공기의 냄새에 대해서, 빗방울이 땅바닥을 두드리는 소리에 대해서, 하루 종일 떠들 수 있는 사람이다. 한국에선 꽃집에서야 볼 수 있는 유칼립투스를 이곳에선 없는 곳을 찾는 게 더 쉽다고 과장하며 말할 수도 있다. 다섯 시쯤 해가 바다에 반쯤 잠겨 있을 때 세상이 얼마나 고요 해지는지에 대해서, 그것을 바라보는 바다 사람들의 겸손한 뒷모습에 대해서, 밤바다가 얼마나 새까맣게 무서운지 경진은 밤새도록 말하고 쓸 수 있다.
그러나 이곳에서 에이미는 "it's wonderful" 한 문장을 겨우 뱉어낸다. 자신이 말을 할 수 있었던 걸, 목소리를 잃고 나서야 깨달았다.
7월 17일
어쩌면 생각보다 에이미가 주인공인 그 드라마의 결말을 빨리 알게 될지도 모르겠다. 샤넬은 일주일에 사흘로, 사흘에서 이틀로 에이미의 근무시간을 줄였다. 이름 옆에 공백이 있는 건 에이미가 유일했다. 받아 든 스케줄표 아래로 구두가 보인다. 존이 얼마 전 이주치 주급으로 선물해줬다. 존에게 말하지 않았지만 에이미는 그다음 날 아침 바로 구두 뒤축을 꺾어 신고 나섰다.
며칠 내내 내린 비로 그새 여기저기 얼룩이 생겼다. 에이미는 그런 자신이 받침 몇 개가 빠져 촌스럽고 기이하게 반짝거리는 다방 네온사인같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8월 1일
에이미는 피구를 가장 싫어했다.
한 사람 빼고 다 한 대씩 맞아야 비로소 끝이 나는 게임이라니. 에이미는 무리 틈에서 몸을 숨겨가며 화가 난 듯한 표정의 공을 이리저리 피하는 쪽이었고, 어쩌다가 공을 받아내면 우물쭈물하다가 공격의 기회를 놓치고 수비 쪽으로 공을 넘겨버렸다. 쪼그라든 풍선이 된 기분이었다. 그러다 공에 맞으면 민망한 얼굴을 감춘 채 어색하게 웃으며 수비 쪽으로 나갔다. 왜 하필 오늘 초라하고 괴로웠던 그날이 떠올랐던 것일까. 이제 근무표 속 에이미의 이름 옆엔 비어있는 공간이 더 많다. 함께 스케줄표를 들고 있던 공장 직원들이 더 머쓱해하며 에이미를 지나친다.
8월 8일
오늘도 하고 싶은 수천 개의 말을 놓쳐버리고 수요일 칸에만 숫자가 적힌 종이를 받았다. 에이미의 시간은 파도처럼 매일이 똑같았고, 늘 새로웠다. 에이미는 더 이상 셔츠를 손빨래하지 않는다.
8월 15일
에이미의 스케줄 표엔 수요일 10시부터 11시, 달랑 한 시간만 적혀있다.
8월 22일
에미이는 스케줄표를 받지 못했다. 진주알 같은 빗방울이 뚝뚝 내린다.
8월 31일
해가 났다.
세상은 다시 물감같이 선명하게 변했다.
볕은 목덜미를 데우고 사람들은 해를 따라 움직인다. 인간의 마음엔 저마다 크고 작은 정원이 있다고 한다. 에이미의 마음에도 그녀만 들어갈 수 있는 정원이 하나 있었다. 에이미는 석 달간 부지런히 땅을 일구고 , 씨앗을 심고 정성껏 물을 주어 빨간 꽃을 탐스럽게 피워놓았다. 아무도 보지 않는 정원에서 매일이 똑같고 늘 새로운 시간을 쌓아나갔다.
경진은 다시 이력서를 뽑아 들고 옅게 퍼져나가는 보라색 노을을 바라본다.
장마가 끝났다.
이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