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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매일 걷는 사람 May 27. 2022

꿀떡과 단념

 엄마는 정수리에서 등을 타고 발등까지 땀이 뚝뚝 흐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고 했다. 젊은 한숨들이 그녀의 뒤통수에 날카롭고 깊게 꽂혔다. 엄마는 단지 피로했고, 밥하기가 지겨워 새로 생긴 햄버거집에서 끼니를 때우고 싶었을 뿐이었다. 어디서 들어보긴 했던 것 같다. 사람 대신 커다란 기계가 주문을 받는 시대가 됐다는 것을. 그냥 그대로 등을 돌리고 나올 것을, 무슨 자신감으로 기계 앞에 섰나, 자신을 원망했다고 한다.

햄버거 그림과 봉투 그림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나보다. 아무리 봐도 불고기 버거 그림이 보이지 않았다. 엄마는 결국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뒤에 서있는 학생들에게 자리를 넘겨주었다.

그녀에게 이 정도의 단념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어차피 엄마의 인생은 단념과 포기로 만들어져 있었다. 시장 입구로 들어서 낯익은 얼굴들을 보니 이제야 온몸에 피가 도는 기분이 들었다. 단골 떡집에서 세 팩에 오천 원을 주고 쑥떡과 인절미, 꿀떡을 샀다. 그 자리에서 비닐을 뜯고 허겁지겁 분홍색 꿀떡을 하나 집어 먹었다. " 점점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되어간다고 생각했는데, 나이가 든다는 건 눈에 띄게 비대해져 불편한 존재가 되는 거야" 수화기 너머 엄마의 목소리가 머리에서 떠나지가 않는다. 다 큰 자식들이 집을 떠나고 난 뒤 육십이 넘은 엄마 아빠는 어떤 하루하루를 살고 있는 것일까.


얼마 전에 엄마는 내 생일 선물을 사러 시내에 새로 생긴 대형 쇼핑센터에 다녀왔단다. 점심 먹고 커피를 마시는 게 아니었다고 후회했다. 자꾸 소변이 마려웠다. 아무리 살펴봐도 세모 위에 동그라미가 그려진 표지판이 보이지 않았다. 요즘엔 "화장실"이라고 한글로 정직하게 쓰여있는 표지판 따위가 없다는 것쯤은 엄마도 알고 있었다며 멋쩍게 웃었다. 지나가는 여학생을 잡아 화장실을 물었다. 학생의 손가락 끝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뛰어갔다. 변기에 앉자마자 휴, 긴 한숨이 절로 나왔다. 손을 씻으며 땀에 미역처럼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정리하다가 이마에 바큇자국처럼 난 주름을 한참 바라보다 슥슥 문질러봤다. 엄마는 그날 밤 포털사이트에 화장실을 영어로 검색해서 수첩에 적어두었다. 염병, 멀쩡하게 우리나라 말이 있는데 왜 다들 영어를 못써서 환장들을 한 것이냐, 투덜거리면서.


꿈속에서 엄마는 무인 자판기 앞에 서있었다. 낮에 엄마의 등 뒤에 서있던 학생들이 그녀를 촘촘하게 둘러싸고 서늘한 한숨을 내뱉었다. 엄마가 낮에 본 햄버거 그림에 손가락을 갖다 대자마자 발등 위에 분홍색 꿀떡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엄마는 고개를 들어 모니터에 비친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서른아홉의 엄마가 모니터 밖의 예순둘의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엄마가 오랫동안 잊고 있던 얼굴이었다. 너무 많이 울어서 눈 코 입이 지워져 버려서 일까, 아니면 너무 많은 의무와 짐들을 이고 지고 살아서 겨우 표정 따위까지 가지고 다니기가 무거웠던 탓일까.


불도 끄지 않고 잤나 보다. 티브이 속에선 연예인 서넛이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 앞에서 웃고 떠들고 있었다. 내 딸이 있는 곳이 저 나라라지.

그제야 쇼핑센터 갔던 날, 딸의 생일 선물을 사 오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남의 나라 땅에서 이것저것 다 챙겨가며 살 수 있겠냐며 웃던 딸의 피로한 목소리가 엄마의 목구멍에 늘 구슬처럼 박혀있었을게다.

여섯 달 동안 생활비 남은 걸 모아서 딸의 미술학원을 등록했던 때가 엄마 나이 서른아홉이었다. 두 남동생의 학비를 벌기 위해 중학교 대신 방직 공장으로 들어가면서 엄마는 처음으로 단념이라는 것을 배웠다. 그렇게 아무도 모르게 아주 조금씩 휘청거리며 어긋나는 하루하루가 모이다 보면 갖기도 전에 포기부터 배우게 되는 것이다. 아이들의 세뱃돈을 차곡차곡 모아놓았던 통장을 사업이 망한 남편에게 내주면서도 딸아이의 미술학원비 만은 지켜냈다. 그것만은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아이의 미래는 몇 번이고 우리고 방치해서 말라빠져버린 티백 같은 엄마의 인생과는 다르기를 바랐다. 딸의 서른아홉 번째 생일엔 우아한 원피스를 한 벌 사서 보내주고 싶었다.


 어차피 주어진 인생이니 최선을 다해 살아내다 보니 못 배운 것뿐인데 그 대가는 초라하기만 하다. 엄마는 가끔 자신의 시간으로 가족들이 자유를 얻었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그런 생각이 들면 자신이 한없이 비겁한 거 같아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지만 억울한 마음이 드는 것 또한 어쩔 수 없었다.


 이 세상에 느리고 늙은 자들을 위한 자리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철새가 떠나가고 혼자 덩그러니 남은 저 겨울나무 한 그루는 대체 단념을 어디서 어떻게 배운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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