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레에다 히로카즈 <괴물>
최근 우연히 봤던 빌리 아일리시 인터뷰에서 빌리는 '11살은 우울증에 걸릴 수 없어, 혹은 14살에게 우울증은 말도 안 되는 일이야’라는 식의 말을 하면 안 된다는 내용의 말을 했다. 어른들에 의해 단정 지어지는 아이들의 세계는 아이들의 기적적인 순수함을 난도질한다. 많은 어른들이 어린 시절의 순수함을 잊게 되는 것을 보면 이런 식의 판단과 프레임의 폭력이 꾸준히 대물림되고 있지 않나 생각해 보게 된다.
모든 어른은 틀렸다. 이 영화 속 세계관에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사실 '어른들은 틀렸다' 보다는 어른들은 아무것도 모른다에 가깝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른들에 의해 아무것도 모른 채로 자라나는 아이들은 결국 같은 어른이 된다. 영화가 각자 다른 시선에서 3막으로 나눠져 있다는 사실을 알기 전까지 엄마의 시선은 <괴물>이라는 영화 속 세계에서 진실처럼 느껴진다. 그렇지만 그것이 주관적 시선의 결과물일 뿐이라는 사실을 2막이 시작하는 순간 어렴풋이 알게 되고, 영화가 끝나는 순간에는 여러 사건들이 레이어처럼 겹쳐지며 뒤통수가 얼얼해진다. 영화 속에서 어른들이 진실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은 아이들의 입에서 나온 소문들에 불과하다. 이 영화 속 세계와 현실이 굉장히 닮아있는 점은 아이들이 더 이상 어른들을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영화 속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이미 정해진 세상을 강요하는 듯 보인다. 이러한 행동이나 말들은 아이들에게 폭력으로 다가온다. 어른들의 폭력은 아이들의 거짓말을 낳는다.
영화 속 아이들은 언제나 사각형의 프레임 안에 들어있다. 대표적으로 2층에서 1층의 등교하는 아이들을 사각형의 구조물 안에 담아서 표현하는 장면이 있다. 구조적으로 아이들은 언제나 사각에 있게 된다. 아마 이 사각은 사각형 프레임의 의미로도, 우리가 시선을 놓치고 있는 아이들 영역의 의미로도 표현이 될 것 같다. 어른들은 아이들을 항상 사각의 프레임 안에서 해석하고 이해하려 하지만 아이들의 세계는 사각의 프레임이 아닌 동그란 동굴 저 너머에 있다. 영화 속에서 어른들은 이 동그란 관문을 통과하지 못한다. 동굴 너머에서는 사용하지 않아 낡게 녹슬어 있는 열차가 한 칸 있는데 아이들은 이 열차를 자신들의 세계로 꾸며 나간다. 어른들이 이러한 아이들의 세계를 들여다보는 것은 아이들의 세계가 무너진 뒤다. 어른들의 타이밍은 항상 아이들보다 느리다.
영화를 보면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이라는 영화가 많이 떠올랐는데 이 영화는 어떤 면에서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의 정 반대편에 있는 영화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에서 나오는 아이들은 신칸센이 처음 개통되던 시점에서 260km로 달리는 신칸선 두 대가 처음으로 마주 지나가는 순간에 소원을 빌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믿는다. 결과적으로 소원은 이루어지지 않지만 영화 속에서 기차는 기적을 이루어주는 존재로서 아이들의 희망을 지탱하는 역할을 한다. 신칸센의 개통 자체도 뭔가가 시작되는 이미지를 대변하며 아이들의 성장을 함께할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그렇지만 <괴물>에서 이 난파된 기차는 이미 끝을 알고 있는 시작의 난파된 기적처럼 느껴진다.
아이들은 자신들의 이야기가 어떻게 마무리될지 알고 있는 것처럼 행동한다. 그렇지만 다 녹슬고 무너진 폐허 같은 기적이라도 소중히 꾸며나간다. 이러한 행동은 아이들만 보여줄 수 있는 기적적인 순수함이라 생각한다. 순수함은 아이를 아이답게 만드는 요소다. 하지만 아이들은 이러한 아이다움을 어른들 앞에서 보이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면 아이들은 아이다움을 보여주면 안 되는 세계에 살고 있다. 분명 엄마도, 호리 선생님도 서로 오해를 만들기는 하지만 아이들에게는 친절하게 행동한다. 하지만 이러한 친절이나 선함과 아이들을 어른의 방식대로 규정하는 폭력은 별개의 것이다. 영화를 보면 아이들 입에서 ‘호리 선생님은 착하잖아’라는 식의 대화까지 언급되는 것을 보면 그들은 어른들이 보내는 호의나 친절을 충분히 이해한다. 하지만 그들에게 위기와 굴욕을 안겨주는 거짓말을 하면서 친절을 베푼 어른들을 곤경에 처하게 한다. 그들의 거짓말은 아이의 순수함을 더럽히는 거짓말이라기보다는 어른들의 세계 속에 덩그러니 남겨진 아이들이 보내는 비명 같은 것이라 생각한다.
이러한 비명과는 다르게 영화 속에서 그 모든 거짓말과 말 못 할 것들을 털어내는 소리가 나오는데 바로 미나토가 교장 선생님과 함께 트럼펫을 부는 장면이다. 이건 아이들이 꾸며놓은 열차의 기적 소리라는 생각이 든다. 호리 선생님이 자살하려 하는 순간에 들린 소리이자 미나토가 이대로도 괜찮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게 하는 소리다. 이 소리는 작동하지 않던 녹슨 기차를 움직이게 한다. 호리 선생님은 자살하려 올라간 옥상에서 이 소리를 듣고 다시 발걸음을 되돌린다. 아빠에게 너무 많이 맞아 쓰러져있는 요리를 움직이게 하고 호리 선생님과 미나토의 엄마가 이 두 어린아이를 이해하게 한다. 어른들은 아무것도 모른다. 어른들은 내가 확신하는 진실이 틀린 일일 수 있다는 것을 모른다. 영화의 마지막에 미나토와 요리는 ‘우리 새로 태어난 걸까?’ / ‘아니 그대로야…’ / ‘그래? 다행이네.’ 이런 대화를 주고받는다. 이 영화를 다 보고 나서 진짜 기적은 아이들이 지금 이대로도 괜찮다는 것을 깨닫는 것과 어른의 세계에서 그들이 확신하는 진실이 틀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영화가 끝나면 '류이치 사카모토를 기억하며'라는 문구가 나온다. 이 영화는 류이치 사카모토 음악감독의 유작이라고 한다. 그 부분을 생각하면서 본다면 영화 중간에 '부~'하고 울리는 트럼펫 소리가 좀 더 다르게 다가올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