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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초케 Nov 27. 2023

슬픔과 우울에는 술로 해장할 수 없는 숙취가 있다

토마스 빈더베르그 < 어나더 라운드 >

 먼저 나는 술을 마시지 않는 사람임을 밝힌다. 그러니까 이 글의 대부분은 아는 척일 가능성이 크다. 왠지 밝혀야 할 것 같아서 비장하게 말하고 시작한다.



 앞서 말했듯이 나는 술을 마시지 않는다. 담배도 안 피우는데 사람들은 대부분 인생 절반 손해 봤다는 반응이다. 그도 그럴 것이 술이 주는 해방감이나 술이 만들어 주는 수많은 관계들 혹은 이미지들을 생각하면 이해가 전혀 안 되는 것은 아니다. 보통 술은 즐거울 때는 즐거움을 배로 만들기 위해서, 슬프거나 우울할 때는 슬픔과 우울함을 내려놓기 위해서 마시는 듯하다. 그렇지만 술을 아예 안 마셔본 사람 입장에서 바라보면 술은 감정의 증폭제 역할을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다. 그러니까 즐거울 때 즐거움이 배로 될 수는 있지만 슬픔이 마이너스되지는 않을 것 같은 이미지다. 물론 술로 인해서 꺼내기 어려웠던 문제들을 꺼내놓는다거나 술자리를 빌어 그런 감정들을 풀어내는 건 맞지만 그건 조금 다른 문제라고 본다. 술이 주는 '용기'는 용기라기보다는 생각이나 이성의 울타리를 부수는 행위에 가깝다. 사실 슬픔과 우울을 내려놓게 하는 건 고민이나 생각을 털어놓는 행위 자체에 있다. 술로 인해서 고양된 느낌이 슬픔을 해소하는 듯한 착각이 들 수 있지만 술에서 깬 뒤에는 해소감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기분까지 더해져 현자타임처럼 더 낮게 추락해 있는 듯한 느낌이 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봤다.


토마스 빈더베르그 < 어나더 라운드 > 포스터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전에 이렇게 술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이유는 이 영화가 술과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영화의 주인공인 마르틴은 중년의 나이에 접어든 역사 선생님이다. 마르틴은 대다수의 중년이 겪는 권태와 무기력함 속에서 감정적으로 위기를 겪고 있다. 영화에는 마르틴의 학교에서 함께 근무하는 세 명의 친구들이 함께 나오는데 마르틴과 이 세 명의 친구들은 그들이 각자 겪는 중년의 위기를 술로써 극복하고자 실험을 한 가지 진행한다. 핀 스코르데루라는 스웨덴 정신과 의사에 의하면 모든 인간은 혈중 알코올 농도가 0.05% 부족하다고 한다. 이 부족한 알코올 농도를 채우면 사람이 조금 더 창의적인 사고를 하고 활발해진다는 것이다. 마르틴은 친구들과 인생을 바꿔보자고 하면서 이것에 대한 실험을 진행하게 된다. 그들은 실험을 위해 두 가지 규칙을 세우는데 최소 0.05%의 알코올 농도를 유지할 것, 저녁 8시가 넘어가면 술을 입에 대지 말 것, 이 두 가지 규칙을 가지고 실험을 시작한다.

 

 실험 초반 이들은 꽤 이 실험에 진심이다. 마르틴은 실험의 정확도를 위해 알코올 측정기까지 구매한다. 정확하게 0.05%를 맞추고 수업에 들어간 네 명의 선생님은 열정 없던 학생들의 열의 넘치는 리액션과 완전히 뒤바뀐 수업 분위기를 보면서 알코올 농도를 맞추는 일에 집착하게 된다. 마르틴은 가정에서도 아내와의 관계가 소원해지고 있었는데 실험을 시작하고 나서는 가족여행을 가서 텐트 안에서 아내와 사랑을 나누게 되고 학교에서의 수업도 순조롭게 진행되면서 자신이 아직 죽지 않았음을 끊임없이 확인하고 증명한다. 그리고 이러한 끊임없는 증명은 끊임없이 술을 마시는 행위로 귀결된다. 결국 네 명의 친구들은 혈중 농도 0.05%를 넘기면 어떻게 될까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에게 맞는 농도가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하면서 그들이 정한 규칙의 선을 모두 넘어버린다. 결과적으로 마르틴은 술을 너무 많이 마신 나머지 길에 쓰러지게 되고 이걸 아들이 발견하게 된다. 침대에 오줌을 싸던 어린 아들을 욕하던 니콜라이는 자신이 침대에 실례를 하게 되고 톰뮈와 피터는 학교에서 술로 인한 문제가 생긴다.


 이들은 실험의 막바지에 모두 알코올 중독자에 가까워져 있다. 좋아졌던 그들의 수업이나 가족관계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는 듯했고 마르틴은 이혼 위기까지 마주하게 된다. 결국 그들은 실험을 중단하기로 하고 술을 멀리하기 시작한다. 마르틴은 술을 마시는 것을 중단하고 아내와의 관계를 다시 회복하려 하지만 뜻대로 잘 되지 않는다. 그러던 중 가장 심하게 알코올 중독 증세를 보이던 톰뮈가 자살을 하게 되는데 이들은 톰뮈의 죽음을 기리면서 끊었던 술을 다시 마시게 된다. 이 날은 이들이 가르치던 학생들의 졸업식 날이었는데 마르틴은 그들과 술을 나눠 마시면서 춤을 추고 마르틴의 춤과 함께 영화는 끝난다. 마르틴과 그의 친구들은 삶이 뜻대로 되지 않아 누구보다 삶을 잘 통제하고 싶어 했던 사람들이다. 그런 그들이 마지막 남은 통제력까지 잃게 만드는 술에 의존하려 했던 것은 우리 주변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아이러니다.


 인생을 바꾸는 것은 부족한 0.05%를 채우는 행위일까, 아니면 부족함을 인정하고 슬픔을 온전히 받아들이며 추는 춤인가. 결국 영화에서 새로운 국면을 만드는 행위는 술을 마시는 행위가 아닌 춤을 추는 행위에 있다. 그렇다면 춤이라는 것을 어떻게 정의해야 할까. 사실 이것만큼 무의미한 행위는 없지 않은가. 춤이라는 것은 나를 둘러싼 모든 무의미하고 부조리한 것들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는 행위다. 그 모든 것들은 언제나 지루함과 정적인 상태를 유지하려 하는 관성을 가지고 있다. 그렇지만 그 모든 것들을 체화하여 춤이 되는 순간, 무의미함을 담은 채 정적이고 지루하던 풍경은 어느 순간보다 역동적이고 매력적인 풍경을 만들어 낸다. 영화의 초반은 학생들이 맥주를 마시며 이어달리기를 하는 축제로 시작한다. 처음에는 이것이 술을 마시는 행위 자체에 대한 대물림이나 세대 간의 연결고리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영화의 마지막에 나오는 마르틴의 춤을 보고 있자면 이 이어달리기는 역동성에 대한 이어달리기로 보인다. 젊음과 노화 사이에서 이들을 여전히 역동적으로 이어주는 것은 끊임없이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무의미에 대한 반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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