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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초케 Sep 05. 2023

<오펜하이머>결국 관계 속에서 폭발하는 이야기

크리스토퍼 놀란 <오펜하이머>

 우주의 관점에서 보면 지구는 미시세계다. 거대한 운명의 관점에서 다시 들여다보면 개인의 짧은 역사 역시 미시세계다. 이 영화는 오펜하이머라는 원자를 중심으로 돌고 있는 전자들의 이야기이자 원자와 전자의 관계성에 대한 이야기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오펜하이머라는 인물을 두고 융합과 분열을 반복하게 하여 이야기를 폭발시킨다. 그가 가진 천재성과 인간적인 아이러니들은 결국 관계에서 비롯되어 그의 시간들을 뒤흔든다.


 

 천재의 이야기는 역시 천재가 써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만큼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오펜하이머라는 인물의 감정적인 면모들을 섬세하게 이해하고 있다. 물론 그 모든 감정들과 고민들은 오펜하이머 본인만 알겠지만 이 영화는 적어도 보는 사람의 입장에서 오펜하이머와의 완벽한 동기화를 경험하게 해 준다.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 들었던 생각은 양자역학이라는 겉핥기도 어려운 학문을 영화적 이미지로 완벽하게 구현했다는 점이다. 이 영화의 구조는 오펜하이머의 주변 상황과 내면의 상태가 핵융합(컬러)과 핵분열(흑백), 이렇게 두 가지의 갈래로 나눠져서 진행된다. 융합의 서사에서 오펜하이머는 주변의 인물들을 언변과 매력으로 끌어당기고 리드하며 하나의 목표를 가지고 나아간다. 분열의 서사에서 오펜하이머는 버려지고 벗겨지며 정말 원자만 남을 때까지 분해된다.


 융합의 서사(컬러)는 오롯이 오펜하이머라는 인물에게 초점이 맞춰지는데 분열의 서사(흑백)를 보다 보면 이 이야기는 오펜하이머가 아닌 스트로스가 주인공인 것처럼 묘사된다. 이야기 자체에서 오펜하이머라는 인물을 배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컬러 장면과 흑백 장면이 교차될 때 오펜하이머의 추락은 더더욱 비참하게 느껴진다.  또한 오펜하이머의 개인적이고 내밀한 이야기가 컬러로 표현되다가 이 내밀한 이야기를 미래의 시점에서 뒤흔드는 흑백의 이야기로 흘러간다. 컬러 장면들은 오펜하이머가 원자폭탄이라는 거대한 목표를 만들기 위해 달려 나가는 거시세계의 이야기라면 흑백의 장면들은 스트로스와 오펜하이머, 오펜하이머와 그를 둘러싼 관계들 사이의 아주 미세한 감정선을 다룬 미시세계의 이야기처럼 보이기도 한다. 전자를 관찰할 때 관측하는 것만으로 전자에 영향을 줘 결괏값을 바꿔 버리는 것처럼 거시세계에서의 오펜하이머의 행동은 미시세계에 있는 스트로스의 행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오펜하이머는 오만할 만큼의 성취감과 이 모든 걸 내려놓게 하는 죄책감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공산주의에 매료 됐지만 그와 반대편에 있는 미국을 너무나 사랑했다. 키티를 사랑함과 동시에 진 태트록을 사랑했다. 양자역학은 미시세계의 모든 현상을 확률로 설명하는데 영화를 보면 놀란 감독은 이 확률에 대해 지독하게도 50:50 혹은 흑백으로 양분할 수 있는 확률적인 설정을 고집한다. 더 많은 확률과 경우의 수가 있겠지만 그런 요소들을 배제시켜 오펜하이머라는 인물에 대한 주의를 다른 곳으로 분산시키지 않는다. 그렇기에 스트로스라는 인물이 화면에 지속적으로 나와도 그와 정 반대편에 있는 오펜하이머가 보이는 것이다. 영화 속에서 오펜하이머와 스트로스는 양자처럼 얽혀있다. 아인슈타인과 오펜하이머의 대화를 관측자 입장의 관객이 관측한 순간 스트로스와 오펜하이머가 얽혀있는 결말은 이미 정해진 것이다. 그렇기에 결말은 아인슈타인과의 대화로 돌아온다.



 영화 속에서 시간의 순서는 무의미하다. 사실 영화에서 중요한 건 오펜하이머의 일대기를 시간 순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닌 오펜하이머의 수많은 감정적 가능성이 중첩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오펜하이머가 자신의 손에 피가 묻어있는 것 같다고 하며 죄책감을 가지는 순간 분열의 이야기로 넘어가며 오펜하이머는 구조적인 분열을 일으킨다. 하지만 그 안의 대사들은 오펜하이머가 명성에 익숙해지고 그러한 자신의 지위를 이용한다고 나온다. 그 순간들은 대외적으로는 오펜하이머의 주가가 높아지면서 오만함의 정점을 찍는 시간들이지만 그의 안에서는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한 죄책감과 앞으로 일어날 일들의 연쇄반응에 대한 불안함이 공존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양가감정과 모순들은 영화의 끝까지 중첩되고 중첩되다가 아인슈타인의 한마디에 의해 한꺼번에 폭발한다. 이 시점 자체는 영화에서는 과거라 할 수 있는데 이 연쇄반응이 이미 시작되어 진행되고 있었음을 가장 마지막에 보여주는 연출은 정말 소름이 돋았다. 그런 이유로 영화 중간에 나오는 오펜하이머가 폭발을 느끼는 듯 진동하는 장면은 영화가 끝나고 나면 다시 새로운 의미로 받아들이게 된다.


 영화는 양자역학만큼이나 어려웠다. 그래서 두 번 봤다. 보고도 이해를 못 한 부분들이 많다. 그렇지만 놀란이 오펜하이머라는 인물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이 뭘까 두 번 생각할 수 있었던 점은 좋았다. 덤으로 양자역학이라는 학문의 수박 주위 공기입자들을 핥아볼 수 있는 시간도 가졌다. 오펜하이머 같이 비범한 인물이 가지는 모순과 고민들은 나같이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이유 모를 위로 같은 것을 준다. 내가 평소에 생각하는 하찮은 고민들, 나와 세계 사이의 모순이 역사 속 거대하게 자리 잡은 누군가에게도 존재한다는 사실이 작게나마 위로가 된다. 비슷한 형태의 그림자를 가지고 살아가는 같은 인간이라는 점에서 동질감을 가지고 몰입해서 봤던 것 같다. 평소 내가 가지는 죄책감이나 불안하게 생각하는 미래의 이미지는 순서대로 내 머릿속에 등장하지 않는다. 어떤 특정 순간들이 뒤죽박죽이 되어 머릿속에 등장할 때면 내 자아와 나를 둘러싼 세계가 분열하는 느낌을 준다. 오펜하이머라는 인물이 이러한 순간들을 스스로 감지할 때 느꼈을 감정들을 그려나가며 놀란 감독 또한 비슷한 감정들을 느끼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놀란 감독은 그 시대를 살았던 것도 그 사람들을 만나본 것도 아니다. 어쩌면 그 감정들을 추론한다는 것은 가장 불확실한 재료들을 가지고 형태를 빚어내는 과정일 것이다. 불확실한 것들이 모여 어떻게 형태를 유지하는가. 놀란은 이 물음에 대해서 오펜하이머라는 인물을 가지고 놀라운 실험을 마쳤다. 폭발하는 이야기의 마무리를 보면서 우리가 가지는 확신에 대한 의문이 피어남과 동시에 불확실성에서 오는 가능성이 생각보다 따뜻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뚜껑을 열기 전까지는 결과를 알 수 없다. 뚜껑을 열어보더라도 확신했던 결과와는 다를 수 있다. 이 두 가지를 가슴에 새기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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