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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잣집에는 정말 없다구?

- 정리수납전문가입니다

by 이혜경

'부자'라는 단어가 들어가야 뭔가 솔깃한 느낌을 주면서 시선을 끄니까 쓰게 되는 타이틀이겠지만 나는 가끔 올라오는 동종업계 사람들의 '부잣집에는 없는 * * *' 또는 '부잣집에는 없고 가난한 집에는 있는 * * *' 그런 류의 제목들에 좀 거부감이 있다.

내가 부자가 아니라서 삐딱하게 보는 거라고 누군가 말한다면 일단 부자가 아니니 할 말은 없지만 그래도 역시 그 말들을 인정할 수는 없다.


직업상 나는 다른 사람의 집을 늘 방문한다.

지금까지 대략 2000집이 훨씬 넘는 곳을 방문해 봤으니 대한민국의 온갖 형태의 집은 다 봤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집 안에 엘리베이터가 있는 고급주택, 130억이라는 청담동의 고급빌라에 정리의뢰를 받아서 가기도 하고 바퀴벌레와 거의 동거하다시피 하는 집에도 집정리 봉사를 위해 다녀왔다.

경제적인 수준으로만 본다면 하늘과 땅 차이를 다 보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서두에 언급한 그런 류의 글들에는 대개 부자는 계획적이고 미래지향적인 삶을 살고 현재를 절제하고 가난한 사람들은 과거에 연연하고 무계획적이고 즉흥적인 삶을 사는 것처럼 서술되어 있는 경우가 많던데 정말 그럴까?



아주 꼬마가 아니고서는 대한민국에서 모르기가 쉽지 않은 식품회사의 딸 집에 가 본 적이 있다.

어디 한 군데 여유라고는 없이 빽빽하게 들어 선 물건들 중 아직까지도 인상적으로 기억되는 건 셀 수 없이 많았던 '잠옷'이다.

옛날 유럽 배경의 영화에서 본 것 같은 온통 레이스가 달린 발목까지 오는 긴 잠옷이 입고 있는 것도 수 십 벌인데 비닐포장도 뜯지 않은 새 잠옷도 55L 리빙박스에 꾹꾹 눌러 담아 4~5개 정도를 보관했던 기억이 있다.

정리하다가 우연히(그냥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었다.) 본 그녀의 주식 배당금 내역은 '헉' 소리가 났다.


사업을 한다던 50대의 혼자 사시던 남성분도 생각이 난다.

방 두 개에 'ㄷ'자 형태로 빙 둘러 선반을 설치하고 온갖 물건을 차곡차곡 쌓아놓으셨다. 그 댁에서 인상적이었던 건 그릇세트였다. 포트메리온, 레녹스, 유기, 로얄코펜하겐....

대한민국 홈쇼핑 방송에서 판매하는 온갖 종류의 그릇세트들이 다 있는 것만 같았다.

정작 1인가구였는데 말이다.


청담동 어떤 집에는 아직 물건도 꺼내지 않은 채 방치되어 있는 많은 쇼핑백들이 있기도 하고 부자는 아닌 것 같은 어떤 집에도 테이프도 뜯지 않은 택배 박스가 쌓여있기도 하다.

봉사를 위해 찾은 어떤 집에서는 알콜중독 아빠가 온 동네를 돌아다니며 주워 모은 쓸 수도 없어 보이는 산더미 같은 고물들을 만나기도 한다.



돈을 주고 사 모았든지 동네를 돌아다니며 주워 모았든지 내용은 다르겠지만 공통적으로 물건에 집착이 있으며 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고 그들에게서 느껴지는 공통적인 감정은 '결핍'이다.

애정 결핍이든 경제적 결핍이든 하여간 뭔가 부족한 상태로 보여지는데 이건 빈부를 가리지도 않는다.

서두에 언급한 '부자'가 스스로 뭔가를 이뤄 낸 특별한 사람들을 지칭하는 거라면 내 거부감이 이해부족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겠지만, '부자 = 돈 많은 사람'이라면 서두의 얘기들은 확실히 틀렸다.


그냥 이런 사람, 저런 사람이 있는 것이다.

얘기거리를 만들자니 그랬겠지만 뭔가 갈라 치기 같아서 참 싫다.

평소에도 맘에 들지 않던 말들이었는데 오늘 왜 유난히 꽂혔는지.. 역시 내가 '부자=돈 많은 사람'이 아니어서였을까?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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