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인하고도 아비투스, 아들러의 꿈
무엇이든 하나에 꽂히면 크게 의미부여를 하는 나는
내 인생의 타임라인에 꼭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과 행동이 있었다.
왜 일까. 나는 왜 꼭 해야만 하는 것들이 있고, 그것들을 해내서 스스로를 증명해내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으로 자랐을까? 나는 행복을 좇는다고 하지만 왜 그 행복의 바닥에는 왜 결핍이나 혹은, 열등감 같은 것들이 자리 잡고 있을까?
왜 나는 이런 어른일까. 하고 생각해 본 적이 있다. 아니, 너무나 많다.
'어떤 결핍은, 나를 어중간한 행복에 살게 한다.'라고 자주 생각해 왔다.
왜 나는 이런 어른일까 생각해 본 적이 있나요?
왜 나는 이렇게 살아가고 있을까요? 왜 나는 지금과 같은 모습일까요?라고 질문한다면, 잔인하지만, 당신이 이렇게 살기로 선택했습니다.라고 저는 말할 거예요. 아니, 저 또한 마찬가지로 이렇게 살기로 선택해 왔습니다.
심리학자인 아들러는 교육 안에서 길러지는 사회성, 같은 환경 안에서도 환경에 대해 어떻게 해석하는가에 따라 아이의 미래가 달라진다고 했다. 이는 아이도 성인도 결코 다르지 않다.
우리는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매 순간들에 나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 될지 선택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고 본인의 선택에 따라 행동하며 살아간다.
같은 환경 안에서 상황을 어떻게 해석하고, 어떤 말과 행동을 하는지에 따라 매 순간 나라는 사람이 쌓여가고 있다. 그렇기에, 잔인하지만 당신이 이렇게 살기로 선택했다고, 나는 이렇게 살기로 선택한 거라 말했다.
물론, 지금의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변화하기로 결심하고 행동하면 될 일이고
너무도 마음에 든다면 자신의 신념대로 살아가면 될 일이다.
좀 더 아들러의 예를 들어 나의 이야기를 해보자면
어느 날 읽었던 아들러의 심리학 책에서 읽었던 문장들은
타자의 기대에 담보 잡힌 채 나의 꿈이 온전히 나의 꿈이 아닌 것만 같던 나를 돌아보게 했다.
괴테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사람의 성격과 본질을 파악하려면
말과 행동을 보지 말고 꿈을 보는 편이 낫다고.
물론 좀 지나친 말이다.
하지만 사람이 자신의 열등감을 해소하고
우월 욕구를 추구하는 장으로
꿈이 종종 활용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므로 말과 행동보다 더 정직할 때가 많다.
우리는 그 사람의 전체적 성격과 부합하는 증거가 꿈에서 발견될 때에만
그 사람을 이해하는 요소로 꿈을 활용하기로 한다.
- 항상 나를 가로막는 나에게 中, 알프레드 아들러 저
아들러는 우월감과 열등감은 단 하나만 존재할 수 없고 공존한다 말했다. 감정 기복의 행동들은 열등감의 표현이고, 끊임없이 무언가를 하려 안달하는 사람은 깊은 열등감에 사로잡힌 사람이라고.
처음에는 발가 벗겨진 기분이 들었지만, 오히려 '맞아! 나도 그래.' 하고 받아들이고 나니
내가 꾸는 꿈의 기저에 깔린 열등감은 무얼까 생각해보고 나라는 사람을 더 이해하게 되었던 것 같다.
나는 경제적인 부 보다는 한 분야에서 최고의 자리에 오른 사람들을 동경하고, 나 또한 그런 어른이 되기를 바라 왔다. 학문적으로 최고의 경지에 오른 학자나 교수를 동경했고, 내가 알고 있는 것들을 기반으로 배움을 나누는 것에서 우월감이라는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성공일 것이라고 스스로 상상해 왔던 것 같다.
하지만, 이 문장에서 나는 내가 바라는 꿈을 "경제적인 부"에 비교하고 있는데,
내가 무엇을 좇고 좇지 않는다고 말할 때 늘 비교대상이 되는 걸 보면 이 또한 어린 시절부터 가졌던 결핍에 기반한 게 아닌가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부자가 되는 선택을 하기보다, 내가 하고 싶을 일들로 나를 채워가며 그 분야에서 꽤 단단한 사람이 되기로 노선을 정했다.
당신이 살고 싶은 삶이 있나요?
대학원에 진학해서, 내게 큰 영향을 끼친 단 하나를 꼽으라고 하면 나는 피에르 부르디외의 "아비투스"를 말한다.
문화예술경영학 논문들을 읽다 보면 꽤 많이 인용되는 게 부르디외의 "아비투스"와 "문화자본"에 대한 개념이다. 처음 이 개념을 접했을 때, 내가 살고자 하는 삶을 살기 위해 내가 나의 환경을 바꾸고 행동하는 모든 것들이 이 개념으로 해석되어진다는 것에 놀랐다.
사실 이 개념은 너무나도 잔인하다.
사회학자인 부르디외가 말하는 아비투스(habitus)는 권력 기반의 사회질서(법, 제도, 종교, 사상, 교육, 예술 등)는 구조화되어 있다. 그는 이 구조와 행위에 대한 설명을 하기 위한 핵심 개념으로서 '아비투스'를 말한다.
아비투스는 개인이 사회화 과정을 거치는 동안에 무의식적으로 스스로의 성향에 대한 것들을 특정한 방식으로 규정짓는 것들, 행동하는 성향, 구조화된 기질을 뜻한다.
부르디외는 어린 시절의 가정환경과 교육, 그리고 경험들로 인해 성향 체계(아비투스)가 형성된다고 말한다. 그리고 후천적인 노력에 의해서도 아비투스는 변화할 수 있다고 말한다. 후천적으로 높은 수준의 문화를 향유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될 수 있고, 소유할 수 있다고.
문화예술에 대한 기호와 취향은 학습에 의한 체화된 문화 자본이고, 교육제도를 통해서 제도화된 문화자본(학력 같은 것)을 가지게 된다고도 말했다. 교육을 통해서 문화 자본을 형성하고, 계층 이동의 중요한 수단이 교육이라고.
너무나도 자명하지만, 이 얼마나 뼈 때리는 잔인한 말인가. 부르디외의 사상은 엘리트주의적인 시각이 아니라고 말할 수가 없다. 특정 문화에 대한 우월한 아비투스가 존재하고, 바꾸고 싶으면 후천적인 노력으로 인해 바꾸라는 말이 아닌가. 선택하지 않으면, 당신이 선택하지 않은 것이고 선택한 사람들은 참된 사회화 과정을 거쳐 온 사람이라는 느낌마저 들게 하고. 너무나도 갈망하지만, 너무 아프다.
문화예술을 공부하고, 문화예술이라는 영역 안에서 성공이라는 경지에 오르기를 꿈꾸고,
그러기 위해 나의 환경을 바꾸어 공부하고,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고 예술의 영역에 있는 사람들을 만난다. 나의 삶을 들여다보면, 나는 나의 인생을 계속해서 '나를 두고 싶어 하는 어떤 환경'에 데려가기 위한 선택들을 한다. 가끔은 나도 나와 타자를 규정짓고 나를 내가 우월하다 생각하는 위치에 두려 하는 실수를 범하기도 한다. (실수라고 표현해도 될까. 타고난 재능을 키워 스스로 활용하는 일은 잘못이 아닌데. 왜 이 문장에 불편한 지점이 있는지 고민해 봐야겠다.)
정리해보면 나는 이렇게 살아가고 싶다.
업무적으로 대체 불가능하면서도, 타인의 평가에 의존하지 않는 단단한 사람이 되는 것.
일만 하는 삶이 아니라, 나와 주변도 돌보면서 무엇이 행복인지 아는 사람이 되는 것.
면면히 좋은 영향을 미치는 사람이 되어, 나를 잃는 것이 두려운 관계가 되는 것.
주어진 세상을 탓하기보다,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세상을 살아가는 것.
글을 마치며,
똑같은 일상이 이상하게 오늘따라 다른 시선으로 바라봐지는 순간이 있다.
나의 삶과 소중한 것, 순간, 사람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될 때 당연하다고 느꼈던 일상이 때로는 넘치게 감사해지기도 한다. 꿈이니 뭐니 해도 결국은 행복이 제일 아닌가!
거창하게 꿈이나, 살아가는 인생의 태도나, 삶의 방식에 대해 생각지 않더라도
이 글이 나의 오늘을 잠시 다른 시선으로 바라봐 줄 수 있게 하는 글이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