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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H Mar 23. 2024

안읽씹의 마음은 답장을 잘하고 싶은 마음

안읽씹의 재발견

나는 아주 느슨하게 연락을 하는 편이고 안읽씹에도 탁월하다. 


공적인 연락이 아닌 이상 며칠이 흐른 뒤 답장할 때가 많고, 타이밍을 놓쳐서 아직까지 답변하지 못한 연락도 있다. 그래서 핀잔도 많이 들었고, 상처도 많이 줬던 것 같다. 서운해하는 분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이를 정말로 고쳐야겠다는 생각을 한 적은 없다. 이게 나의 소통방식이자 나만의 속도이고 내 성향이니까. 그러나 최근에 영지님의 안읽씹에 관한 유튜브 영상의 댓글들을 보고 너무 충격을 받아 난생처음 '진심으로' 이 습관을 고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에게는 예의의 문제가 아니라 방식의 문제이지만,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명백한 예의의 문제라고 느끼고 있다면 내 본래의 성향을 거스를 줄도 알아야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진지한 물음을 던졌다. '나는 왜 안읽씹을 하는가?' 일단 절대 상대방이 싫어서는 아니고. 이전에는 그저 혼자만의 재충전 시간이 필요해서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어떤 연락에는 마음의 여유가 없는 상태에서도 빠르고 쉽게 답변하고 어느 다른 연락에게는 기력이 회복된 뒤에도 답장을 선뜻 보내지 못하는 것으로 보아 단순 재충전의 필요성 때문은 아니라는 결론이 났다. 


저절로 화두는 '답장을 선뜻 보내지 못하는 연락은 어떤 특성을 띄고 있는가?'로 옮겨갔다. 답하는 데 오래 걸리는 연락들을 차례로 떠올려보았다. 정말 그저 할 말이 없어서 답변을 보내지 않았던 유형을 제외하면, 대략적으로 

1) 친구들의 응원·격려·감사·칭찬 문자 (ex: 아인아~ ~해서 너무너무 고마웠고..) 

2) 어른들이 보내주신 안부 연락 (ex: 아인씨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3) 내 생각을 구체적으로 전달해야 하는 연락 (ex: 피드백을 요청해 온 상황) 정도로 리스트업 할 수 있었다. 1,2,3의 특성을 지닌 것들 중에서도 ‘장문’으로 온 연락일수록 답장 속도는 더욱 늦어졌다.


그렇다면 나는 이러한 유형의 연락에 답장하는 것을 왜 유예하게 되는가? 

이유는 '답장을 보내는 데 시간과 에너지가 많이 들어서'였으며, 

시간과 에너지가 많이 드는 이유는 '답장을 길고 정성스럽게 보내다 보니까'였다. 

예컨대 상대가 보내온 장문에 답장을 쓰고 나서 전송을 누르면, 대개 상대의 연락보다 제 답변의 길이가 더 긴 우스운 상황이 벌어진다. 길게 쓰려고 의도한 건 아닌데, 결국엔 항상 그렇게 된다. 장문의 연락이 아닌 경우에도 상황은 비슷하다. 내가 이런 말을 보내면 상대가 할 말이 없어지진 않을지, 너무 장난스럽거나 너무 무거운 톤은 아닌지, 식상한 멘트이거나 재미없는 답변은 아닌지, 평소 이 사람의 말투를 고려했을 때 이 이모티콘은 부담스럽게 느껴지지 않을지, 그렇다면 어떤 이모티콘이 적절한지 등등 등등 자잘한 거 하나하나를 신경 쓰게 됩니다. 상대가 보내준 관심에 내가 할 수 있는 최대치로 화답하고 싶은 마음, 피드백을 누구보다 꼼꼼하게 전하고 싶은 마음은, 내 100%를 다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답장을 보내지 못하는 습관을 낳았다. 답장을 잘하고 싶다는 마음이 기어코 독이 된 것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답장을 ‘잘’한다는 게 답장을 ‘빠르게’함을 의미하지만, 나에게는 그것이 답장을 ‘정성껏’함을 뜻해왔던 것 같다. 이러한 나의 기준은 언뜻 보면 상대방을 위하고 배려하는 마음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이기적인 마음이라는 걸 깨달았다. 아무도 나에게 그 정도의 정성을 요구한 적이 없는데, 오히려 많은 사람들이 '정성스럽지만 한참 지나서 오는 답장'보다 '공을 덜 들이더라도 빠르게 오는 답장'을 원할 텐데, 나는 내 욕망과 내 기준에만 충실하게 행동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안읽씹의 재발견

어이가 없었다. 이전 브런치에 올린 글들을 기억하는 분들은 알고 있을 거다. 정말 많은 글들에서 ‘잘하고 싶은 마음을 내려놓아야 진짜 잘할 수 있다’고 매번 깨닫고 그때마다 최선을 다하지 말자고 다짐했다. 그 정도로 잘하고 싶다는 욕망은 나를 자주 갉아먹었다. 그런데 연락 부분에서까지 이 성격이 기승을 부리고 있었을 줄은 몰랐다. 지긋지긋하게 일관된 나의 모습에 이제 질려버릴 것 같다. 


제발.. 제발..! 최선을 다하지 말자.. 적당히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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