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멋쟁이 소방관 Nov 16. 2023

죄짓고는 못살아

지금이라도 사과할 수 있어...

2003년 어느 날,     


“네, 119입니다.”

“밤늦게 죄송합니다. 아무리 초인종을 누르고 문을 두드려도 집 안에 인기척이 없어서 연락드렸는데요. 아들 혼자 있어서 아무래도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지… 정말 죄송한데 좀 도와주실 순 없나요?”     

집안 문제를 ‘연락 두절’ ‘자살 암시’와 같은 극단적 표현으로 포장한 뒤 119에 신고해 소방관들을 곤혹스럽게 하는 일들이 많은 요즘, 문 개방 출동 건은 그때나 지금이나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알겠습니다. 그쪽으로 지금 출동하겠습니다.”     


전후사정을 파악한 119 종합상황실은 현장으로 구조대를 출동시켰다.     


“곤아! 옥상에서 로프 연결해서 3층으로 내려가자.”

“네, 알겠습니다.”     


한곤 소방관은 몸에 로프를 묶고 옥상에서 하강한 뒤 창문을 열고 내부 진입을 시도했다. ‘스르륵’ 다행히 창문이 열리고 내부 진입에 성공했지만, 있어야 할 아들은 없고 침대에 여자 두 명이 공포에 질려 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저… 그게… 놀라지 마세요. 저는 구조대원입니다. 소방관이에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근데, 혹시 여기 3층 아닌가요?”

“네? 아니요. 아니에요. 여긴 4층이에요.”

“아! 죄송합니다. 저는 3층인 줄 알고… 그럼 저는 3층에 용무가 있어서 다시 내려가 볼게요.”     


한곤 소방관은 3층으로 내려가기 위해 창가에 있던 책상을 밟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런데 ‘뿌지직’ 하는 소리가 선명하게 울려 퍼졌다. 등이 뜨거워졌지만 ‘설마 부서졌을까’ 애써 이 상황을 외면한 채, 태연하게 3층으로 다시 내려갔다. 3층에 도착한 한곤 소방관은 창문을 열어 아들을 아빠에게 인계했고, 그렇게 출동은 마무리됐다.

광주소방안전본부 화보집

그로부터 2년 뒤,     


영어 회화 수업을 듣던 한곤 소방관은 같이 수업을 듣던 여학생으로부터 재미난 이야기를 우연히 듣게 된다. 그런데,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어딘가 모르게 내 이야기 같단 생각에 머리털이 쭈뼛 솟았다. 아니나 다를까? 2년 전 창문을 열었던 한곤 소방관의 이야기였다.     


“저… 혹시 그때 창가에 있던 책상 있잖아요. 그거 혹시 부러졌나요?”     


갑작스러운 한곤 소방관의 질문에 여학생은 당황하며,     


“네, 그때 부러졌는데… 아니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라고 되물었다.

“사실 그때 책상 밟고 올라간 소방관 바로 접니다. 정말 죄송해요. 설마 부서졌을 거라곤 생각 못 했어요.”     


한곤 소방관은 미안한 마음에 그날 점심을 샀고, 두 사람은 ‘세상이 이렇게 좁을 수 있나’ 하며 함께 그날 이야기를 다시 되뇌었다. 그리고 한곤 소방관은 말했다.


“죄짓고는 못살겠네요. 지금이라도 사과할 수 있어 다행이에요.”



<남부소방서 한곤 소방위의 실제 이야기를 바탕으로 제작했습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