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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멋쟁이 소방관 Mar 25. 2024

광주소방 화보 제작기(記)

모방도 나만의 색깔을 입히면 창조가 아닐까?

2015년 초가을로 기억한다. 국민안전처 소속 중앙소방본부(現, 소방청)와 해양경비안전본부(現, 해양경찰청) 홍보 담당자들이 한 자리에 모인 자리였다. 국민안전처는 2014년 세월호 참사 이후 만들어진 조직이다 보니 소방과 해양경찰은 안전이라는 큰 타이틀만 같을 뿐, 엄격(?)하게 내외했다. 정말 그랬다.


원형 테이블에서의 어색한 눈빛 교환도 잠시, 으레 각 시. 도별 홍보 우수사례 발표가 이어졌다. 식상하고 뻔한 내용을 포장지만 다르게 입혀 말하는 발표자를 바라보면서 실소를 금치 못했다. 날씨 탓인지 아니면 장거리 운행 때문인지 지루한 발표가 계속될수록 눈꺼풀은 점점 두 눈을 따듯하게 덮고 있었다.

     

미드 '섹스 엔 더 시티'에선 소방관이 섹시한 직업으로 묘사되는데, 대한민국에선 '라면 먹는 소방관' 그야말로 짠내 나는 직업입니다.

미드, 섹시, 라면까지... 단어 하나하나가 범상치 않아선지 닫혀있던 눈꺼풀이 모세의 기적처럼 열렸고, 음소거 됐던 두 귀도 보청기를 단 듯 명확하게 들렸다.


마이크를 잡은 건 서울소방 몸짱달력을 제작한 실무자였는데, "불쌍하고 짠한 소방관의 모습이 아닌 섹시하고 멋진 소방관이 돼야 하지 않겠냐"며, "조각처럼 멋진 소방관들의 모습을 담은 몸짱달력을 제작하게 됐다며..." 그간 몸짱소방 달력 제작의 변(辯)을 이어나갔다.


그래! 소방관은 '동정'의 대상이 아닌 '동경'의 대상이지


절대적 동기부여가 된 발표를 듣고, 짠내 나는 소방관 이미지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며 살아왔던 내 모습을 돌아보게 됐다. 변화시킬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것을 어느 누군가는 하고 있지 않은가? 안될 거라 생각하지 말고 나 역시도 멋진 소방관을 만드는데 손을 보태야겠다고 생각에 등허리가 뜨거워졌다. 뭔가 짜릿한 아드레날린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이럴 땐 느끼는 쾌감이 좋다. 변태처럼.




가장 먼저 생각한 건 광주소방 '화보제작'이었다. 


공무원 사회가 대부분 그렇듯, 어디 한 곳에서 히트를 치면 여기저기서 벤치마킹을 한다. 사실, 좋은 말로 벤치마킹이지 시쳇말로 하면 ctrl+c / ctrl+v 아닌가? 그래서 여기저기에서 그 밥에 그 나물 같은 업무를 만들어 낸다. 나 역시도 몸짱소방관에 대한 벤치마킹을 생각 안 한 게 아니다. (아주 잠깐) 그도 그럴 것이 주변에서 "우리도 몸짱소방관 달력 하나 만들어야지" 하며 "만들면 대박 날 거야"라는 희망회로를 돌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화상환우를 돕는 선한 의도를 가진 서울소방과 나눠 먹기식 접근과 복사하기식 업무 추진은 내 성격상 용납할 수 없었다.


몸짱달력이 아닌 소방화보집... 소방의 모든 면을 담을 수 있는 화보를 만들자!   


왜 대한민국에는 소방관을 담은 화보집이 없을까?
'몸짱만이 소방관의 전부가 아니지 않은가?'
'책 한 권을 만들려고 해도 적당한 소방관 사진 한 장 없는 게 현실 아닌가?'


그렇게 화재와 구조, 구급 등의 현장에서 열심히 땀 흘리며 훈련하는 소방관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담아보겠다며 한 장 짜리 보고전을 만들어 윗분들의 결재를 받았다.(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나를 믿고 적극적으로 밀어주는 분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쥐꼬리만 한 홍보예산에 거의 무료봉사 수준으로 함께 할 사진작가를 알음알음으로 섭외했지만, 정작 중요한 소방관 모델 선발이 되지 않았다. 화보를 찍겠다며 광주소방 전 직원에게 알렸지만 당시 1400여 명의 소방관 중 지원자는 '0'명. 외롭고 힘들었다. 하지만, 젊은 패기였을까? 아니면, 그런 고통이 오히려 더 흥분되게 만들었을까. 한숨도 사치라 생각하며 낙담하기보단 임용 동기들에게 전화를 돌리고 친분이 있는 선후배들에게 찾아가 사진을 찍어줄 것을 간곡히 부탁했다. 그야말로 읍소였다. 읍소!


관용차가 아닌 개인차로 눈이 오는 무등산에 오르고, 보안구역인 군공항에 위치한 소방항공대까지 찾아가 촬영 콘셉트를 잡고... 하나하나의 멋진 작품을 만들기 위해 사진작가와 수많은 얘기가 오가고, 모델들의 손짓과 표정을 컨트롤했다.


쉽지 않은 여정이었고 누군가는 그런 과정이 있었느냐고 되묻기도 하지만, 1년여간의 긴 과정을 거쳐 마침내 광주소방 첫 화보집이 2018년 12월 세상에 나온다. 하지만, 언론 발표는 2019년 1월 초를 잡았다.(왜냐고? 공무원 조직은 연초에 보도자료가 많지 않아 더 스포트라이트를 받기 좋다.) 그렇게 시작된 첫 화보제작이 코로나까지 이겨내며 2022년까지 이어지며 명백을 이어왔다. 해가 거듭할수록 사진을 찍겠다는 지원자가 늘어났고, 더 이상 해외가 아닌 국내에서도 멋진 사진들이 만들어졌다. 소방청과 다른 시도 소방에 공유하도록 해 지금까지도 책자와 리플릿, 플래카드 등 다양하게 활용되고 있다. 소방청 SNS의 대부분의 사진이 광주소방 사진이기도 하다.


승진과 함께 현장부서를 거쳐 소방학교로 자리를 옮겼다. 그동안 홍보담당자 자리도 두 번이나 교체가 됐다. 하지만, 화보촬영과 화보제작은 더이상 없었다.



꼭 묻고 싶었던 질문이 있다. 광주소방 화보는 서울소방이 제작한 몸짱달력을 모방한 것일까?


나는 '아니요'라고 자신있게 답변할 수 있다. 서울소방 몸짱달력에서 최초 착안해 기획했지만, 몸짱달력에 없는 전혀 새로운 걸 만들어 내지 않았던가? 또, 광주소방 화보는 소방의 다양한 분야에서 200% 활용되고 있다. 그러면 새로운 창조라고 봐도 되지 않을까?


모방도 나만의 새로운 색깔을 입히면 창조다.



서울 몸짱소방 달력이 제작된 이후로 다른 시도 소방에서 비슷한 콘셉트로 몸짱달력을 제작됐다. 뿐만 아니라 군과 경찰, 의료진까지 비슷한 콘셉트의 달력이 쏟아져 나왔다. 수익금을 사회에 환원하는 선한 의도도 닮았다. 그렇다면 그건 모방인가? 창조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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