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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낙유 Nov 19. 2024

내 안에서 흐르는 시간

상가들이 늘어선 대로변에 50미터 간격을 두고 자리를 잡은 두 개의 작은 포장마차. 차가운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하니 지나칠 수 없는 달콤한 향을 풍기며 어김없이 퇴근길에 가던 걸음을 멈추게 한다.


마 전 새로 생긴 포장마차는 20대 중반으로 보이는 젊은 남자 두 명이서 연신 허리를 굽히고 멋쩍은 웃음으로 손님을 대하는데 누가 봐도 처음 장사를 시작한 모양새다. 가격은 세 개에 천 원. 슈크림은 두 개에 천 원이라고 큼지막하게 쓰여 있다. 팥과 슈크림을 섞어서 팔지는 않나 보다. 둘 다 맛을 보려면 2천 원으로 다섯 개를 사야 한다는 뜻으로 읽힌다. 왠지 어설퍼 보이는 행색에 반죽이 부족했는지 팥과 슈크림이 터진 옆구리에서 흘러내리는 게 보인다. 예전부터 자주 봐왔던 검은색 틀에 반죽을 넣고 팥과 슈크림을 채운 다음 다시 반죽으로 덮어서 한쪽 면을 익히고 틀 하나하나를 돌려가며 반대편을 익히는 장비다. 어려서부터 봐 온 장비가 눈에 익어서 괜히 더 반가운 느낌이 든다. 착한 가격은 덤이다.


다른 한 곳은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할아버지 혼자서 운영을 하시는데 세 개에 2천 원이라고 대문짝만 하게 쓰여 있다. 옆 포장마차와 50미터 떨어져 있긴 하지만 가로수 몇 개를 제외하면 장애물이 없어서 서로가 훤히 보이는데 가격을 두 배로 받는다니. 그것도 대문짝만 하게 쓰인 것을 보고 무슨 똥배짱을 부리 신 건가 싶었다. 가격 차이에도 불구하고 두 곳 모두 줄이 길게 늘어선 것은 매한가지인데 줄을 설 수는 없어서 잠깐 구경삼아 지켜보았다. 아니? 우리가 알고 있는 검은색 장비가 아니다. 기존의 돌려가면서 굽는 장비가 아니라 와플을 굽는 것처럼 접었다 펴는 것이었다. 잠깐 구경을 했을 뿐인데 당연함 속에서 새로움을 발견한 것처럼 심장이 요동치고 들떴다. 반짝반짝 빛이 나는 은색의 네모난 장비는 반죽을 넣고 속을 채워 반죽으로 덮은 후 반대편 틀을 접고 기다리면 한 번에 다섯 마리씩 완성이 되었다. 할아버지는 한 번에 다섯 마리씩 완성되는 이 장비를 3대나 가지고 계셨고 순식간에 열다섯 마리를 만들어 내시는 것이었다. 어쩌면 세 마리에 2천 원이라는 가격이 저렴한 게 아닐까, 오히려 감사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이 고급스러운 장비의 퍼포먼스를 1열에서 직관하려면 이 정도는 지불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일에는 얼른 집에 가서 아이들을 돌봐야 하기에 길게 늘어선 줄을 보며 아쉬운 마음을 포장마차에 남겨두고서 돌아오는 주말에 꼭 잊지 않고 찾으러 오겠다고 다짐한다. 그리고 약속의 토요일에 되자 아침부터 팥이냐 슈크림이냐를 두고 아이와 깊은 고민을 하며 들뜬 마음을 달랜다. 결국은 둘 다 맛을 볼 것임을 알면서도 괜히 고민하는 척 설레는 마음을 흠씬 뿜어 냈다. 오픈 예상 시간인 10시에 맞춰 아이와 함께 포장마차로 향했다. 언제부터 나오셨는지 할아버지께서 장비를 다루고 계셨고 사람들 몇몇이 포장마차 앞에 서 있었다. 저 옆에는 추운 날씨 때문인지 아직 비닐 옷을 꽁꽁 싸매 입고 잠을 자고 있는 젊은 친구들의 포장마차가 보인다. 


1열에서 직관하는 은색의 장비는 왠지 어제보다 더 반짝이는 것만 같다. 포장마차에서 한발 떨어져 계신 분들은 주문이 끝난 것 같았고 할아버지 정면에서 돈을 들고 발을 동동 구르고 계신 분은 방금 오신 분 같았다. 오픈 시간에 잘 맞춰 왔는지 두 번째 대기 자리를 차지한 나는 아이와 함께 쾌재를 불렀다. 잔뜩 들뜬 마음에 아이와 눈웃음을 주고받으며 맛있겠다는 감탄을 연발하는데 반해, 손님이 왔는데도 눈길 한번 주지 않는 할아버지는 오직 장비에만 온 신경을 쏟고 계신다. 주문을 하고 싶은데 앞에 계신 손님도 돈을 들고 계시니 뭐라고 말을 하기가 민망한 분위기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날씨도 추운 데다 얼른 한 봉지 가득 사들고 나서 아침 일찍 운동하러 간 아내의 마중을 가야 하기에 마음이 급해 앞에 계신 손님을 따라 발만 동동 구르고 있다. 아이도 같은 마음이었는지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느냐고 묻는다. 마땅히 대답할 거리를 찾지 못해 잠시 머뭇거리다가 맛있는 거 먹으려면 원래 기다리는 것이라는 말로 아이의 마음을 다독인다. 뒤 이어 오는 손님들에 점점 길어지는 줄에도 할아버지는 여전히 눈길 한번 주지 않는 모습에 답답함을 이기지 못하신 앞에 계신 손님이 팥 9개를 달라며 돈을 내민다. 그럼에도 할아버지는 아무런 대꾸 없이 반죽에 팥과 슈크림으로 속을 채우자 손님은 돈을 든 민망한 손을 거둔다. 이를 지켜본 나와 아이는 괜히 조마조마한 마음에 서로 눈을 마주치며 걱정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안 그래도 급한 마음인데 불안함까지 더해지고 말았다. 


얼마 후 이 손님은 다시 한번 할아버지에게 팥 9개를 주문하며 돈을 내밀자 고개를 든 할아버지는 먼저 오신 손님들부터 드리고 난 다음에 만들어 드릴 테니까 기다리시라는 말로 응대를 한다. 먼저 오신 손님들은 조급한 손님을 보며 미소를 지으시는데, 불과 몇 분 전의 본인의 모습이 그랬음을 상기시켜 주는 것만 같아 웃음이 나왔다. 조금은 쌀쌀맞게 느껴질 할아버지의 말씀에 나와 아이의 동동 구르던 발은 흔들림 없이 제 자리를 찾았다. 손님들의 다급함에 할아버지도 서두르실 법 한데 시종일관 개의치 않은 모습에 나의 급했던 마음이 여유를 찾는 순간이 느껴졌다.


줄어들지 않는 줄에 상황을 파악하고 주문하는 방법을 묻기 위에 앞으로 오는 손님들을 나무라는 듯한 할아버지의 응대에 우리의 바로 뒤에 계신 아주머니께서 맛있는 거 먹으려면 혼이 나기도 한다면서 기대에 얼굴로 웃으며 말씀하신다. 며칠 전에 지나가면서 때와 달리 최첨단으로 보이는 은색의 빛나는 장비는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다. 세 번째 순서의 인상이 좋은 아주머니께서는 여기가 비싸긴 한데 팥과 슈크림 들어가는 양을 보니 맛은 있겠다고 하시며 갑자기 나이가 몇이냐고 물으신다. 나이를 들으시고는 아이를 보고 조카를 데리고 나온 줄 알았다 하신다. 아주머니 큰아들이 서른셋이라 비슷한 나이로 보여서 말을 걸어봤는데 굉장히 어려 보인다고 칭찬을 주신다. 사실은 모자를 눌러쓰고 있어서 그렇지 옆머리에 흰 눈이 쌓이기 시작한 지 오래라 염색을 하지 않으면 본래 나이보다 더 들어 보인다. 이어서 아들이 경찰 공무원이고 내년 2월에 결혼을 하고 둘째 아들도 얼마 전에 경찰이 되었다며 핸드폰을 꺼내서 사진까지 보여주셨다. 칭찬을 들었으니 마땅히 돌려드려야 하기에 아드님들을 훌륭하게 키우시느라 고생 많으셨다고 했다. 그러자 아들들이 떠오르셨는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어머니의 미소를 지으시며 아이와 눈인사를 나누신다. 따님도 예쁘고 야무지게 생겼다며 클 것이라는 말씀과 함께 조금 더 대화를 주고받았다. 앞에 계신 손님이 9개를 주문하시는 바람에 우리는 최첨단 장비가 일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1개 슈크림 2개가 담긴 봉투를 받았다. 분명히 번째 순서였는데 시간은 20분가량이 지나 있었다. 세 번째 아주머니께 인사를 드리고 김이 모락모락 나는 봉투를 들고서 아내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길에서 호호 불어가며 먹어야 제 맛을 느낄 수 있기에 잔뜩 기대하는 아이는 슈크림을 먹겠다며 호시탐탐 벼르지만 너무 뜨거운 나머지 제대로 먹기가 어렵다. 


급한 마음에 초조했던 감정이 할아버지의 흔들림 없는 장인 정신과 호통 아닌 호통으로, 서로 다르게 흐르던 시간이 포장마차 할아버지의 시간에 맞춰지는 것이었다. 내가 여유를 되찾은 순간에 빠르고 정신없이 흘러만 가던 시간이 천천히 흐르기 시작했고 좁게만 보이던 시야가 확 트임을 느꼈다. 결국은 마음먹기에 달린 것이었다. 세상을 바라보는 마음, 사람을 대하는 태도, 스스로를 돌보는 성찰로 긍정적인 변화를 일으켜 낼 수 있는 것이다. 가을과 안녕해야 하고 코 끝이 시려오는 겨울을 느끼기 시작하는 때에 마음을 알아차리는 소중한 순간을 선물 받은 것만 같다. 그리고 어린 시절에 아버지와 함께 느꼈던 그 겨울의 감정을 지금 내 아이도 느끼고 있을 것이라 생각하니 추위는 온 데 간데 없이 마음이 따듯해진다.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고 연결되지 않은 것이 없음을 다시금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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