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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대엽 Dec 17. 2023

창밖 설리반

일층끝병실

창밖 설리반



***




설리반, 당신이 휠체어를 타고 창밖으로 뛰어내리는 꿈을 꿨어 깨어나니 울고 있었고

아킬레스건을 다친 환자에게 복숭아색 토슈즈를 선물하는 일이 낙원에서 금기시된다는 농담은 들어본 적 없다 글을 쓴다고 모든 이야기를 다 아는 건 아냐 나쁜 의도가 아니라는 변명을 수십 번째 되풀이하는 저녁 염병하게 끈적한 침대보 텅 빈 삼인실 병동 바람에 펄럭이는 흰 시폰 커튼




당신이 말했다 놀라지 말고 들으라는 말은 대체로 놀랄 일이니 환자에겐 하지 마

그래도 오늘은 꼭 해야 했다 요즘 네가 낯설어 애당초 너도 모를 너를 안다고 믿었다니 괴상한 일이지 삼류 영화에나 나올 진부한 대사지만 당신은 변했고 고장이 난 건 발목만이 아니야




늘어날 대로 늘어난 상아색 카디건 니들 마크 새하얗고 가는 발목 푸석한 살갗 낮과 밤이 뒤섞여 슴벅대는 눈 스크린 속 영화배우처럼 그럴싸한 표정으로 느릿느릿 움직이는 너의 입 *다정함이 영원히 남진 않아- 대외적으로 쓰는 맨송맨송한 미소 후에 이어지는 침묵은 우리가 우리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침대에 걸터앉아 살도 없는 장딴지를 쥐어뜯는 험한 낯짝에 말을 건넨다 당신 뒤통수를 보며 손톱을 물어뜯는 나를 창으로 훔쳐보는 당신을 그린다면 비싸게 팔 수 있지 않을까



나이든 간호사가 축축한 속눈썹에 빛이 들면 곤란하다며 전등을 끄고 작은 취침 등을 켰다 생기라곤 없는 설리반의 입술 위에 내 입술 포개고 간이침대를 폈다

새벽 비 맞은 머리칼에서는 고소한 냄새가 난다고 했다 어젠 아무 냄새도 맡지 못하면서 자꾸 담배를 피웠느냐 물었다 숲이라도 해-헤치고 다닌 건지 초록 자국 잔뜩 묻은 환자복 점점 더 앙상해져 언젠간 사라질 몸과 마음 내가 늘 깔끔해서 좋다고 말하던 걸 기억해 온종일 네게 귤을 까주다가 노랗게 물든 손톱을 숨긴다




사랑-사랑과-사랑을- 자꾸만 입에서 굴리다 보니 결국 수많은 당신을 사랑하게 됐어 어떤 날엔 바람둥이가 된 거 같다니까 돼먹지 않은 마음 끌어안고 괴로움에 시달리는 날이 많아 이거 계속 사랑이라고 불러도 괜찮을까 꺼내지 못할 불안으로 참새처럼 뾰족한 입 뻔히 보이는 걱정과 이어진 형편없는 언행 전부




의료 사고가 빈번하다는 오래된 대학병원에서 인턴들은 과로사 직전이고 간호사 절반은 웃으며 창문으로 뛰어내렸다 실은 너를 침대에 꽁꽁 묶어 두고 싶어 살아 있는 것 이상으로 중요한 일이 뭔데 침묵보다 무겁게 병동을 짓누르는 알데하이드 냄새 작은 바퀴 데굴데굴 구르며 영안실로 사람들 실어나르는 소리 서늘한 은색 엘리베이터 배전반을 타고 펄쩍대는 귀뚜라미 울음 문틈 새로 흘러나오는 끙끙 앓는 환자들의 안부 유언 젠장 여긴 마치 저승으로 보내어질 커다란 선물 상자 같아




텁텁한 목소리로 설리반이 말한다 억지로 사랑을 교섭할 필요 없다는 거 알지 자신 이야기만 담아 읽히길 바라는 간절한 시는 저급하고 타인의 의중을 묻기만 하는 태도는 불온해 그래 당신 말이 맞아 그런데 집어던진 책은 나 아니면 누가 주워 줄 수 있을까 병든 사람 빼곤 모두 잠든 밤늦은 병원에서




창문이 깨질 듯 비가 내리고 발목과 함께 모든 것이 망가진 설리반 너는 비가 오면 그제야 몸만큼 마음도 아파 살아 있는 느낌이 든다고 했다 도무지 나를 마주 보지 않아 이따금 비가 쏴-아 하고 창의 푸른 얼룩 훑어 내릴 때 거기에 비치는 옆 모습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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