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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똥구리 Jan 07. 2024

스키에 반하다

"아프게 짝사랑하라"

  깊고 깊은 산속, 구불구불 잘 닦인 아스팔트 도로를 따라가다 보니 높은 산 아래 우뚝 솟은 리조트와 하얀 눈으로 뒤덮인 스키장이 눈부시다. 드래곤플라자는 지붕이 뾰족하고 외벽이 나무로 장식되어 있어 이국적이다. 스키복을 입고 오가는 사람들을 보니 왠지 설레는 건 어쩔 수 없다.


  스키는 비합리적이고 비경제적인 스포츠라고 생각했다. 스키는 겨울에만 탈 수 있고 스키장까지 오가는데 서너 시간이 걸린다. 한 철 장사이다 보니 스키장 물가도 비싸고 스키, 스키복, 시즌이용권까지 감안하면 매우 비효율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달님이가 스키를 타고 싶다고 했다. 모든 이성적 판단과 경제적 효율은 의미가 없다. 공주님이 가자는데... 가야지! 달님이와 아내와 함께 아침 6시에 출발해 9시쯤 용평스키장에 도착했다.


  스키장에는 깜짝 놀랄 정도로 사람이 많았다. 내가 존재조차 의식하지 못했던 스키장이란 세계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있다는 게 신기하기만 하였다. 슬로프 아래에서 스키를 A자로 모아 멈추는 법과 옆으로 넘어지는 법만 ‘듣고’는 곧장 슬로프로 올라갔다. 스키 코치인 동생의 지론은 스키는 '내려오면서 배우는 것’이란다.


  위에서 본 슬로프는 아래에서 보던 것과 달리 낭떠러지처럼 아찔했다. 스키가 생각보다도 너무나 빠르게 미끄러져 내려가니 겁이 났다. 그래도 용기를 내어, 겁이 더 나기 전에 얼른, A자 멈추기와 방향 전환을 연습하며 내려갔다.


  동생은 뒤로 스키를 타면서 달님이를 붙잡아 주며 내려간다. 그러면서도 중간중간 멈춰 서서 나에게도 코칭을 한다. “A자!”, “오른발에 체중을 실어!” 이해는 되지만 몸이 따라주지 않는다. 그래도 한번 내려오고 두 번 내려오니 재미가 생겼다. 속도는 느리지만 몇 번 내려오니 혼자서 천천히 내려올 만한 비결은 터득했다.     


  몇 시간의 악전고투 끝에 스키를 벗고 스키하우스에 들어가 아내를 만났다. 엄청난 경사에서 맹렬한 속도로 활강과 방향전환을 시전 했으니 의기양양하게 아내의 축하와 경탄을 기대했다. 슬로프 아래에서 관전하던 아내는 “왜 당신은 그렇게 설설 기어와? 달님이가 두 번 탈 때 자기는 한 번도 못 타던데?”라고 하였다.


  내가 느끼는 속도와 밖에서 보는 속도에는 현저한 차이가 있었다. 나중에 동생이 찍은 동영상을 보니 아내의 “설설 긴다”라는 표현이 과하지는 않았다.


  지난겨울, 스키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다. 비효율적이고 비경제적인 건 맞지만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 그 가치는 그리 심오하지 않다. 그저 재미있다. 스키장 위에서 보는 파란 하늘과 파도처럼 이어지는 대관령을 바라보며 하얀 슬로프를 쏜살같이 질주하는 그 쾌감은 느껴보지 못한 감각이었다.


  이 재미있는 운동을 빛나던 그 시절에 왜 안 했을까 아쉽기만 하였다. 아쉬운 건 스키가 아니다. 모든 일을 너무 쉽게 단정 짓고 한계를 정해버린 내 젊음이 아쉬운 것이다. 그때, 왜 그리 삼가는 게 많았을까?


  어색하고 어정쩡한 게 청춘이고, 짝사랑이야말로 젊음의 특권, 아니 의무('아프게 짝사랑하라', 장영희)인데 그 의무를 저버리고 담담한 척 아무렇지 않은 척, 살아온 그 시절이 아깝기만 하다. 장영희 교수님은 불혹의 편안함보다는 여전히 짝사랑의 고뇌를 택하겠다고 하였다. 교수님의 짝사랑은 제자들에 대한 애정, 학문에 대한 열정이었다. 짝사랑에는 대상도, 기한도, 한계도 없다.


  스키도 그렇고 글쓰기도 그렇고 왜 세상이 점점 더 재미있고 신나는지 모르겠다. 올여름에는 강릉 바닷가에 가서 서핑을 배워볼까 싶다. (23.1.10, 24.1.7)  ⓒphotograph by GB ('2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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