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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똥구리 Dec 31. 2023

비 개인 후

  팔월의 어느 여름날, 비 개인 후 거리는 깨끗하고 아름다웠다. 비를 맞은 길가의 느티나무와 클로버는 더욱 생기가 넘치고 아스팔트 길도 깨끗해서 보기가 좋았다. 상쾌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공원길을 걷다가 길 잃은 지렁이를 만났다.


  지렁이는 한 뼘 정도이고 포장된 산책길의 폭은 일 미터가 조금 넘었다. 방향만 가로로 잘 선택한다면 인도 밖 풀밭으로 쉽게 탈출할 수도 있다. 하지만 방향을 잘못 택한다면 그 길은 끝도 없고 희망도 없는 고통의 길일 것이다. 세로로 방향을 잡으면 아무리 꿈틀거리고 아무리 몸부림쳐도 그 길은 끝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일어서서 주변을 살펴보면 되겠지만 지렁이는 다리도 없고 눈도 없다. 포장된 도로는 지렁이에게 평면의 세계이다.


  안타까운 마음에 풀잎으로 지렁이를 들어 잔디밭에 옮겨주었다. 보도 위에서 벗어나기 위해 용을 쓰다 힘이 다 빠진 녀석은 움직임조차 없다. 힘이 너무 없어 흙냄새 맡고 땅속으로 들어갈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기운이 넘치는 녀석도 있었다. 풀잎을 갖다 대면 자기를 해치려는 줄 알고 몸부림을 쳤다. 아마 이런 녀석은 풀 속에 들어가면 문제없이 살아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올바른 방향으로 살아가고 있을까? 나도 길을 잃고 같은 자리를 뱅뱅 맴돌고 있는 건 아닐까? 희망도 끝도 없는 길을 걷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는 눈도 있고 다리도 있지만 어느 방향으로 가야 맞는 건지 여전히 모르겠다. 


  삶은 가로 세로만 선택하면 되는 이차원의 세계가 아니다. 삶이라는 다차원 세계를 관망하기 위해서는 눈과 다리가 아닌 다른 무언가가 필요하다. 그것은 지렁이가 눈과 다리를 상상할 수 없듯이 인간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그 무엇일 것이다. 인간의 인식 너머에 있는 그 무엇은 영원히 알 수가 없을 것이다. 누군가 풀잎으로 나를 살짝 들어 인도 밖에 살포시 놓아주면 좋겠다. (15.8.21, 23.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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