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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실에서

by 소똥구리

1011호실 창가 침대를 배정받았다. 창밖으로 의정부법원 고양지원과 장항지하차도 그리고 그 너머로 호수공원이 보였다. 잠시 창밖을 바라보다가 환자복으로 갈아 있었다. 수술과 나흘 간의 입원이 예정되어 있었다.


수술실 대기실, 하얀 천장 아래 환자 4명이 이동식 침대에 누워 신병들처럼 줄지어 서 있다. 마취에서 깨어날 수 있을까 잠시 불안이 스친다. 무슨 소리냐. 지금은 2025년이다. 70년대에도 이런 수술은 했었다고 스스로를 안심시켰다.


수술 후, 많이 아팠다. 진통제를 4시간마다 투여하고 간호사는 친절했지만 병실에 누워 있으니 영락없는 환자였다. 병실에 홀로 누워 아프고 외로우니 오십 년 전 아버지 마음은 오죽했을까 싶었다.


내가 태어나던 해, 아버지는 생명을 담보로 수술을 받아야 했다.


위장관절제술로 생각되는데 당시에는 매우 위험한 수술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한양대 의대 교수 단 한 분만이 그 수술을 할 수 있었다. 천운으로 일정이 맞아 수술을 받으러 상경했지만 살아 돌아온다는 기약은 없었다. 어머니와 일가친척들은 마지막인 듯 눈물로 배웅을 했다.


지금은 도심이지만, 한양대 병원에서 바라보는 왕십리 일대는 도시개발이 어지럽게 진행되고 있었다. 병실 밖 풍경 중에는 건설현장에서 자재를 훔치는 좀도둑도 있었다. 아버지는 “살아만 난다면, 저렇게 도둑질을 하더라도, 살아만 난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단다.


위로 누이 셋이 있다. 아이 넷의 서른 갓 넘긴 어린 아버지는 1972년 차가운 병실에서 앞날을 기약할 수 없었다.


지금 나는 너무나 쾌적하고 너무나 안전한 병실에 있고 직장은 병가로 쉴 수 있다. 병원비 또한 보험으로 해결되는 거의 완벽한 건강보호 시스템의 혜택을 누리고 있다.


아버지가 된 이후, 문득문득 겁이 나는 것은 아이들 때문이다. 내가 죽는 것보다 두려운 것은 내가 없는 세상의 아이들이다.


같은 마음이었을 것이나 서른 살 아버지의 그 절박함과 막막함은 내가 헤아릴 수 없다.(25.1.22, 7.20)




사진_고향옛집터산북교회ⓒ소똥구리(2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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