맵지 않게 되려다가 쨍하게 매워진 고추장 돼지고기볶음
식료품이 거의 떨어졌다. 냉장고에는 파와 돼지고기, 절정의 맛을 내는 물김치와 무채 김치만 남았다.
어젯밤에 만들어서 맛나게 먹은 새우 시금치 된장국도 있다.
머릿속으로 그림을 그려 본다.
갓 지어서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밥.
따뜻하게 마음까지 감싸주는 된장국.
직장까지 가서 유산균의 먹이가 된다는, 지금 끝내주게 맛있는 하얀 물김치.
지인 시어머니의 맛깔나는 무채 김치를 따라 하려다가 망해버린 내 손표 무채 김치. 그리고 파가 잔뜩 들어간... 아! 빨간색 돼지고기가 좋겠다.
오늘의 메인은 돼지고기볶음이다.
돼지고기에 고춧가루로 색을 입히려고 하다가 문득 매운 음식에 대한 갈망만큼 매운 것을 먹지 못하는 가족들이 떠오른다.
‘고추장은 오히려 쉽지 뭐’라고 생각하고 고추장에 온갖 양념과 크게 썬 파를 넣고 양념이 잘 베이도록 재워 놓는다. 이제 저녁에 식구들이 돌아오면 갓 지은 따뜻한 밥과 함께 세팅하면 된다.
참! 맥주가 빠지면 서운하겠다.
지금보다 더 젊었을 때는 매운 음식을 먹는 게 재밌고 좋았다.
그때라고 해서 매운 음식을 잘 먹는 건 아니었지만, 캡사이신이 주는 찌릿하고 열나게 하는 감각이 좋아서 무리하며 도전하곤 했다.
온몸의 모공이 열려 땀이 흐르고 혓바닥은 고통으로 얼얼하면서도 금세 매운맛이 입안에서 잠잠해지면 또 하나 더 입에 넣었다.
매운맛은 참 매력적이다.
게다가 친구들과 식사 자리에서 서로 간 은근히 맵 부심에 경쟁이 붙으면, 음식을 먹는 행위에 소소한 놀이가 추가된다. 매워서 얼굴이 빨갛게 되거나 땀을 흘리거나 고통으로 발을 동동거리는 모습을 서로 놀리면서 ‘음료를 먹어라’, ‘맨밥을 먹어라’, ‘계란을 먹어라’ 등으로 해결책을 주면서 말이다. 그러다가 짓궂은 친구가 제법 진지한 얼굴로 매운맛을 없애는데 따뜻한 물이 직방이라며 컵을 건넬 때, 만약 그 물을 입에 넣는다면 또 다른 고통의 세계가 열리는 것이다.
중년이 되어보니 매운맛이 주는 짜릿하고 짧은 통증의 매력 보다 내 몸이 편안해하는 방향에 맞춰서 사는 게 옳다고 여겨진다.
우리의 몸은 이제까지 이런저런 통증으로부터 회복과 소생을 쉼 없이 반복했다. 질병, 바이러스, 과로, 스트레스, 상처 등에서 본래대로 몸을 되돌리기 위해 내 나이만큼 쉬지 않고 일했던 것이다.
특히 최근에는 많은 사람들이 코로나에 걸렸고, 그들의 몸은 바이러스로 인해 사라지고 상처받은 세포들을 회복하고 소생시키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
나의 몸도 50년간 꽤나 수고했다. 회사로 치자면, 뜨거운 청춘을 다 바쳐 밤이고 낮이고 일에만 몰두했던 일중독 @차장 즈음 되지 않겠나?
이젠 몸도 지칠 때가 된 것을 인정하고 요구사항을 들어줘야 한다.
‘매운맛을 줄여줘. 장기가 회복하기 힘들대.’
‘잠은 충분하게 자 줘. 집중력에 에너지가 부족해져.’
‘수영은 하지 말고, 걷기만 해 줘. 그게 편해서 좋아.’ 등.
나는 이제 내 몸의 요구사항을 인정하고 귀 기울여 듣는다.
그래서 오늘의 메인 저녁이 되어 줄 고추장 돼지고기볶음은 덜 맵지만 더 감칠맛 나게... 는 무슨, 쨍하게 매운맛이 그리워서 못 참고 냉동실에 얼려둔 다진 고추를 넣어서 매콤하게 만들었다.
그래, 이 맛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