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미포조선
대학 4학년 여름방학을 이용하여 일본 도쿄에 어학연수를 가서 뉴질랜드 유학시절 절친이었던 마사히로 집에 방문하여 알게 된 마사히로의 누나 '아야'상. 서로 사귀기로 약속을 하고 한국으로 돌아온 이후 계속해서 전화와 편지 그리고 팩스가 오가며 사랑을 키워 나갔다. 현대미포조선에 입사하기 전에 양가 집안에서 교제 사실을 알게 되었고, 다행히 일본에서도 유명한 현대그룹에 입사했다는 사실과 장남 마사히로의 보증? 덕분에 암묵적으로 허락을 받았다. 문제는 우리 부모님. 1998년 당시 국제결혼은 흔한 것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일본인과의 결혼은 극히 드물었다. 처음으로 부모님께 교제 사실을 이야기했을 때, 두 분 모두 할 말을 잃어 바로 대꾸가 없으셨다. 입장을 바꾸어 놓고 생각해보면, 아마도 나도 같은 반응이었을 것이다. 부모님은 시간을 가지고 생각을 하셨다. 일본이라는 나라에서 오는 며느리가 한국 사회에서 어떻게 비추어질 것인지, 말과 문화가 다른데 집안의 일원으로 잘 정착할 것인지 등등. 그러면서도 성격 안 좋은 한국 며느리보다는 착한 일본 며느리가 좋다는 이야기도 주변에서 들으신 것 같다. 장고 끝에 한번 만나 보자고 하신다. 그리하여 아야상이 한국에 오기로 했다. 문제는 언어다. 만나더라도 서로 대화가 안 된다. 그래서 부모님께서는 부산에 계신 지인에게 도움을 요청하셨다. 부산 수영구에 위치한 성 베네딕토 수녀원에 연세가 80이 넘으신 수녀님이 계신다. 친할머니와는 사촌관계이고 친할머니가 일찍 돌아가셔서 아버지가 어렸을 때 거의 어머니 역할을 해주신, 우리 집안의 가장 큰 어르신이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어 선생님을 하셨던 수녀님께서는 아직도 일본어를 기억하시고 도와주시기로 하신 것이다. 그리하여 수녀님과 우리 가족 그리고 아야상이 한 자리에 모였고, 수녀님이 부모님과 아야상 중간에 앉으셔서 통역도 하시고, 당신이 궁금해하는 것도 물으신다. 다행히 수녀님께서는 부모님에게 아야상이 아주 참하고 생각이 깊다고 해주셨다. 또한 종교가 없는 아야상에게 천주교인이 되어 성당에서 결혼을 할 수 있겠냐고 물으셨고, 아야상은 이미 천주교인이 되기 위해 가까운 성당에서 교리도 받고 있고, 한국인 선생님에게 한국어 수업도 듣고 있다고 답을 했다. 수녀님의 친절한 질문과 통역 덕분에 부모님 얼굴에 안심과 희색이 돌았고, 결국 허락을 해주셨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를 회상하면, 고인이 되신 수녀님의 도움이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겠는가 싶다. 연세 90이 넘으셔서 돌아가실 때에도 복주머니에 사탕을 모아두시고, 우리 딸 정연이 오면 주라고 동료 수녀님께 말씀하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꽤나 많이 울었던 기억도 난다. 참으로 고마우신 분이다. 하늘에서도 계속해서 우리 가정을 돌보아 주신다는 느낌이고, 앞으로도 그리 해주셨으면 하는 바램이다.
결혼은 인륜지대사다. 신중할 수밖에 없다. 같은 한국인중에도 배필을 찾기가 쉽지 않은데 외국인과 결혼을 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결정이 아니다. 하지만 나는 단 한 가지만 보았다. '밝음'. 결혼을 하기로 결정한 내 여인은 밝다. 마치 어둠 속에 형광등을 켜 놓은 것처럼 항상 밝다. 내가 퇴근하고 집에 돌아오면 밝은 얼굴과 밝은 집이 나를 기다릴 것이며, 내가 힘들고 지칠 때도 항상 옆에서 밝은 기운을 넣어주는 그런 소중한 반려자일 것이다. 24년이 지난 지금도 그녀는 밝다. 집안에 노랫소리가 들리고 재미난 이야기를 들려주며, 적극적인 봉사로 주위에서도 항상 칭찬받는 참 사랑스러운 내 짝꿍이다. 결국 지금 생각해보면, 한국인이냐 외국인이냐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인간이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상식과 도덕이 얼마나 몸에 배어 있느냐와, 나와 코드가 얼마나 잘 맞느냐, 이 두 가지가 아닐까 싶다.
1998년 여름, 휴가를 이용하여 일본에 방문했다. 그리고 장인이 되실 분에게 정식으로 요청드렸다. "따님을 저에게 주십시오. 평생 행복하게 해 주겠습니다." 이미 알고 계셨기 때문에 무난하게 허락을 받았다. 그리고 10월에 결혼을 하기로 결정하였다. 장모가 되실 분은 아야상 만큼이나 밝으시다. 어렸을 때부터 그런 분위기에서 자라서인지 모녀가 이야기할 때는 웃음으로 시작해서 웃음으로 끝난다. 어려운 일이 있어서 항상 긍정적으로 생각하시고 다 잘 될 거라 말씀해주신다. 장인어른은 나와 취미가 비슷하다. 기타 연주를 좋아하셔서 집안에 기타가 많다. 몇 번 기타 치는 모습을 보시더니, 흔쾌히 클래식 기타 하나를 주신다. 너무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았고 그 기타는 지금도 좋은 소리로 나에게 즐거움을 주고 있다. 또 하나 같은 취미는 바둑이다. 나는 바둑을 잘 두지는 못하지만 좋아한다. 군대 있을 때 배운 것이 계기가 되어 꾸준히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장인이 되실 분과 바둑을 둘진 꿈에도 몰랐다. 서로 마주 앉아 바둑을 시작하면 아야상은 과일이며 차며 간식거리를 나르느라 바쁘다. 지금도 처갓집에 놀러 가면 항상 바둑을 둔다. 장인어른과 같은 취미가 있다는 건 얼마나 좋은 일인가.
울산 동구에 위치한 백합맨션. 22평 아파트를 전세 2,000만 원에 계약했다. 바다와 5분 거리이고 베란다에서는 바당 풍경이 훤히 보인다. 결혼 및 신혼살림 준비로 아야상은 한 달 전부터 들어와 본가에서 함께 지내고 있다. 결혼 날짜는 10월 18일로 잡았고 장소는 내가 다니던 변동성당에서 하기로 했다. 일본에서도 많은 손님들이 오신다. 처가 쪽 친척과 아야상이 다니던 회사 동료들, 그리고 뉴질랜드에서 알게 된 일본인 친구들도 여러 명 오기로 했다. 한국어를 전혀 모르는 손님들이기에 통역이 필요했다. 다행히 타임지 연구반 서클 후배 중 일본어 전공을 한 두 명에게 부탁하여 도와주기로 했다. 결혼식 전날, 미리 도착한 일본 손님들을 위해 유성호텔을 예약하였고, 저녁 만찬을 위해 숯불갈비집으로 안내를 하였다. 먼길을 오신 하객 모두에게 인사를 드리고 술잔이 돌며 처음 방문한 한국에서의 즐거운 밤이 되도록 최선을 다했다.
드디어 D데이. 새벽에 폭우가 내려 걱정이 많았는데, 아침에 맑은 하늘이 나타났다. 하늘도 축복을 해주는 모양이다. 식이 열리는 변동성당에 일찌감치 도착하여 여러 준비를 하였고, 하객을 맞이했다. 오랜 친구들, 대학 친구 및 선후배, 직장 동료들. 특히 울산에서는 부장님이 올라오셨는데 그러다 보니 직영 관리자 및 하청업체 사장님들이 총출동하였다. 가득 찬 하객과 성스러운 성가대 성가에 맞추어 혼인미사가 시작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혼인 서약 때 아야상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을 하며 눈물을 흘렸다. 이제 진짜 내 사람이 되는 것이다. 신부님과 하객의 축복 속에 성대히 혼인미사가 끝나고 교리실에 마련된 폐백룸에서 양가 부모님과 친척들에게 인사를 드렸다. 그리고 사진 촬영. 일본에서 온 손님을 포함하여 우리 부부 관계자들이 너무 많아 두 팀으로 나누어 단체사진을 찍어야 했다. 지금 생각해도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마지막으로 한 코스가 더 남았다. 젊은 하객들은 미리 예약해둔 근처 호프집으로 이동해 피로연을 가졌다. 넓은 호프집을 가득 메운 친구들과 일본에서 온 젊은 손님들. 한국의 피로연 문화를 접해본 적이 없는 이들의 눈에는 모든 것이 신기해 보였을 것이다. 술잔이 오가며 축사와 건배사가 이어졌고, 마사히로를 시작으로 마른 명태로 발바닥을 맞기 시작했고, 이를 멈추기 위해 아야상은 옆에서 춤을 추어야 했다. 친구들도 나와서 노래를 부르며 다 함께 즐거운 축제의 시간을 보냈다. 너무 많이 마셨다. 주는 대로 마셔야 하니 얼마나 많이 마셨겠는가. 청주공항에서 제주행 비행기를 타는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제주에 도착하여 호텔에 들어갈 때까지 블랙아웃 상태였다. 멀쩡한 신혼부부들이 많은 가운데 아야상은 얼마나 당황했겠는가. 이렇게 한국에서의 거친 남편 도우미 역할이 시작된 것이다.
2022년 여름, 글을 쓰고 있는 지금, 결혼 후 24년의 시간이 흘렀다. 그 사이 둘째는 대학교 2학년을 앞두고 있고, 가족 모두 건강히 사이좋게 잘 지내고 있다. 어제는 부부 둘이서 가까운 바닷가 골프장을 찾아 라운딩을 했다. 이제 레슨을 마치고 갓 시작한 골프라 공이 잘 안 맞을 때면 힘들다고 투덜댄다. 운동을 한 후 집으로 돌아와 미리 준비해둔 삼겹살과 직접 기른 깻잎, 고추, 호박 등으로 2층 데크에서 소박하게 저녁을 먹는다. 부부가 함께 운동을 하고 함께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즐거운 시간을 갖는 것이 마냥 감사할 뿐이다. 그동안 너무 힘든 일이 많았지만 묵묵히 참고 처음의 밝음을 잃지 않은 내 짝꿍에게 다시 한번 고맙다는 말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