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미포조선
한창 건조 중인 선박에서 일을 할 때다. 선박 내부에 이미 케이블이 설치가 되었는데 후공정 도장 작업을 하느라 페인트가 묻은 전선줄이 꽤 많았다. QM(Quality Manager) 부서에서 케이블 품질에 문제가 있을 수 있다는 코멘트가 나왔고 도장과 내부에서 향후 대책에 관해 논의를 하였다. 케이블 품질에 관하여 보다 자세한 정보를 얻기 위해 메이커인 LG전선 홈페이지를 방문하였다. 1999년 초, 당시의 인터넷 환경은 지금과는 비교가 안된다. 이렇다 할 국내 검색엔진도 없었고, 대기업 정도는 되어야 기업 홈페이지를 갖추었는데 그나마도 한정된 정보를 일방적으로 제공하는 수준이었다. 그래도 내부 회의 시 도움이 되고자 LG전선 홈페이지 구석구석을 돌아다녔다. 그러다가 '묻고 답하기'라는 코너를 보게 되었고, 들어가 보니 지금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인터넷 게시판이 마련되어 그곳을 통해 질문도 하고 답변도 하는 것이었다. 엄청난 충격이었다.
왜 충격이었는지 잠시 설명을 하겠다. 1999년이 들어서면서 인터넷 홈페이지를 만드는 것이 새로운 시대의 흐름을 타는 중요한 요소로 인식이 되고 있었고, '나모 웹에디터'등 HTML 기반 홈페이지를 만드는 툴이나 기업들이 생겨나고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나도 졸업 당시 논문에 HTML에 관한 내용이 포함되어 그것이 무엇이고 어떤 식으로 작동을 하는지 엔지니어적 측면에서 조사를 했었다. 쉽게 이야기해서, 인터넷상에 어떤 내용을 올리기 위해 약속된 규칙으로 페이지를 작성하는 것인데, 말 그대로 내용이기에 작성자로부터 독자에게로 일방적 정보 전달의 수단인 것이다. 독자는 그 내용에 대해서 이의가 있어도 작성자에게 어필을 할 수 있는 양방향 정보 전달이 안 되는 것이다. 그렇게만 알고 있던 홈페이지라는 기능에 양방향 정보 전달이 가능한 '게시판'이라는 것을 처음 보았을 때 그 놀라움은 마치 타임머신이 만들어진 것을 본 것만큼의 기술적 충격으로 다가왔다.
이게 어떻게 가능하지? 퇴근 후 집에 와서 그리고 주말을 이용해 조사를 했다. 결론은 데이터베이스. 데이터를 저장하는 공간을 만들어 수시로 불러내고 저장한다. 사실 그 당시에 DB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고, 그렇다 보니 그 원리와 작동 방식이 너무도 신기하고 파격적이었다. 그날 이후로 인터넷 게시판 프로그램에 흠뻑 빠졌고, 소스를 구해 연구하는 수준까지 들어갔다. 그러다가 CGI, perl, PHP 등등 다양한 스크립트로 작성된 여러 종류의 게시판을 보게 되었다. HTML만 알고 있던 나는 여러 가지 발전된 기술이 웹(WEB)과 접목이 되는 모습이 아주 매력적으로 보였고, 앞으로 이러한 신 기술로 인해 WWW 시대가 엄청나게 커질 것이라는 확신이 점점 굳어져갔다.
1999년 봄, 현대미포조선에 입사하여 1년 넘게 근무를 하면서 여러 가지를 느끼게 되었다. 대학시절 유학까지 다녀오면서 원대한 꿈을 꾸었다. 사회에 나가게 되면 뭔가 멋진 일을 하면서 만족감을 느끼고, 주위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으며 하루하루 박진감 넘치는 생활을 기대했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수천 개의 톱니바퀴로 이루어진 거대한 시스템에서 작은 톱니바퀴가 되어 정해진 루틴을 따라 매일 돈다. 물론 작은 톱니바퀴 하나가 매우 중요하다. 그것이 제 역할을 못하면 다른 바퀴에 영향을 줄테고, 그러면 전체 시스템에 문제가 생길 것이다. 시스템 설계자 입장에서는 바퀴 하나하나가 딴생각하지 말고, 제 역할만 충실히 하기를 기대하고 바랄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나는 딴생각을 하고 있었다. 나의 개똥철학에 대해서 잠시 이야기하자면, 사람마다 각자의 독특한 코드(유전자적 성향?)가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은 튀는 행동을 싫어해서 조직 내 정해진 룰에 따라 문제없이 하루하루 지내는 것을 좋아하고, 또 어떤 이는 틀에 얽매이는 것이 너무 맞지 않아 매일 탈출을 꿈꾸며 산다. 쉽게 이야기하자면, 공무원이 체질인 사람이 있고 아닌 사람도 있는 것이다. 이렇듯 수많은 다양한 코드가 존재하기에 세상이 조화를 이루며 돌고 있지 않은가. 다시 나의 현실로 돌아와서, 매일 아침 출근하는 것이 싫었다. 현장에서 일을 하면서도 점점 의욕이 떨어지고 있음을 느낀다. 가장 큰 원인은.. 인터넷 시대가 훨짝 열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영국의 산업혁명보다 더 큰 변화의 물결이 밀려오고 있음을 어렴풋이 아닌 200% 확신을 하고 있었다. 내 인생에 다시는 오지 않을 이런 중요한 타이밍에 당장의 안정을 위해서 정주영 사단이 만든 아날로그 조선소를 위해 젊음을 바칠 것인가.
퇴사를 결심했다. 임신 중인 와이프는 의외로 걱정스러운 표정이 아니었다. 남편의 뜻에 따르겠다는 의사 표명을 확실히 해주었고, 그것이 나로 하여금 책임감 있는 가장으로써 다시 한번 심사숙고하게 만들었다. 곧 아기가 태어나면 돈 들어갈 일이 많을 테고, 더군다나 현재는 IMF 여파로 경제가 좋지 않아 재 취업도 쉽지 않은 상황이다. 사실 퇴사 후 재취업을 생각하지는 않았고, 너무너무 하고 싶었던 인터넷 사업을 구상 중이었다. 모아둔 돈이 있는가? 전혀 없다. 전세자금 2천만 원이 전재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터넷을 활용하여 내 꿈을 펼쳐보고 싶은 욕망이 그 어떤 현실도 보이지 않도록 가리고 있었다. 대기업 취업이 '하늘의 별따기'라는 인식이 만연한 사회에서 내가 하고 싶은걸 하기 위해 퇴사를 하겠다고 하면, 양가 부모님을 포함 주위 친구들도 백이면 백 이해가 안 되어 말릴 것이 뻔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좀 어이없고 아찔한 감정을 느낀다. 만약에 일이 잘 안 풀렸다면, 상당히 힘든 인생을 살았을 확률이 높고, 나로 인해 가족들도 경제적 고통을 받으며 왜 그때 회사를 그만두었는지 원망과 후회 속에 살지 않았을까. 인생이 도박도 아니고, 더군다나 혼자도 아닌 외국에서 나만 믿고 온 와이프와 곧 태어날 아기도 있는데 너무 무책임한 결정이었다고 23년이 지난 지금의 내가 그때의 나에게 이야기하고 싶다.
1999년 6월, 결국 사직서를 제출했다. 힘들게 공채로 들어온 신입사원이 퇴사를 하겠다는 건 좀처럼 드문 일이었기에 상사와 동기들은 당연히 말렸다. 인사과에서도 다시 한번 생각하라고 여러 번 호출이 왔지만, 나의 결심은 조금도 변화가 없었다. 6월 말까지 근무하기로 정한 후, 전셋집을 내놓았고, 일단 대전으로 가야 하기에 대전에 조그만 전세도 알아보았다. 퇴사하기 며칠 전, 부장님 포함 협력업체 사장님들이 환송회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수십 명의 관리자 분들이 괘씸하다 여길 만도 한데 성대하게 마지막 저녁상을 차려주신 것이다. 정말 고마웠다. 짧은 근무기간이었지만 그래도 사랑을 받았구나 라는 생각에 이날의 성의를 마음속 깊숙이 넣었다. 훗날 이야기지만, 퇴사를 한 후로도 서로 가끔 연락을 하며 경조사가 있을 때 찾아뵈었고, 부서 1박 2일 야유회가 있으면 우리 가족을 초대해 주셨다.
이제 진짜 출발한다. 작은 돗담배를 타고 큰 물고기를 잡아보겠다고 망망 대해로 떠나는 것이다. 스물아홉 젊은 나이에 돈 한 푼 없이 솜사탕 같은 꿈만을 바라보고 비정한 현실의 바다로 출발한다. 이제부터 드라마 같은 진짜 나의 이야기가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