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메모 인터내셔널
1999년 7월, 울산에서의 모든 생활을 정리하고 대전으로 올라왔다. 울산 신혼집은 전세 2천만 원으로 베란다에서 바다가 훤히 보이는 22평 아파트였지만, 대전에서는 어림도 없었다. 2천만 원이 전 재산이었기에 그 보다 높은 가격의 전세는 불가능했고, 인터넷 사업을 해야 하기에 몇 백만 원을 제외하다 보니 1,700만 원에 엘리베이터가 없는 5층 아파트 중 4층 13평을 계약했다. 결혼 시 22평에 맞추어 살림을 장만했는데 1년도 안되어 13평으로 옮기니 장롱이며 여러 가전기기를 놓을 자리가 없어서 줄이거나 버려야만 했다. 속이 많이 상한다. 게다가 첫째가 9월 출산 예정으로 배가 꽤 불러있는 와이프가 장을 보고 4층까지 걸어 올라가야 하는, 울산 시절에 비해 아주 열악한 환경을 제공한 것이 더욱 속이 상한다. 대기업이라는 보호 속에서 벗어난 지 한 달도 안 되었는데 벌써 현실의 찬바람이 느껴진다.
퇴직금까지 합쳐서 수중에 있는 돈은 약 5백만 원. 이 자금으로 머릿속에 가득 찬 인터넷 사업을 시작했다. 최대한 돈을 아껴야 하기에 잘 아는 교수님께 부탁하여 충남대학교 연구실에 책상 하나를 빌렸다. 아무래도 대학교라서 인터넷망이 잘 깔려 있고, 아직 선후배들이 많아 도움도 받을 수 있었다. 기존에 사용하던 컴퓨터의 일부 부품을 업그레이드하여 리눅스 서버 환경을 구축하였다. 그 당시에는 모든 아이피가 고정 아이피라서 24시간 전원과 연결만 되어 있으면 서버로 사용하는데 문제가 없었다. 사람을 고용할 돈이 없기에 내가 모두 해결해야 했다. 사업 계획도 세워야 하고, 기술적인 환경 구축 및 웹서비스 제작도 직접 하기 위해 열심히 공부했다. 그중에서도 인터넷 게시판 프로그램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연구를 하였는데, 워낙 난이도가 높아서 이걸 직접 제작하여 서비스하려면 꽤나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는 판단하에 전문 제작 업체의 상품을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CrazyWWWBoard. 당시 국내에서 가장 인기 있는 인터넷 게시판 서비스다. 웬만한 웹호스팅 업체에서도 이 게시판을 사용 중이며 무료일 뿐만 아니라 직접 소스를 다운로드하여 서버에 설치할 수 있었다. 구조적으로 보자면, C언어로 제작이 되었고 RDB가 아닌 GDB 데이터베이스 스타일을 채택하고 있었다. '노브레이크'라는 회사에서 제작한 것인데, 대전 카이스트 창업센터에 입주한 촉망받는 벤처기업이다. 마침 친구 중에 한 명이 이 회사의 임원과 아는 사이라서 소개를 받아 미팅을 하기로 했다. 카이스트 창업센터에 처음 방문한 날, 나는 또 다른 세상을 보았다. 대한민국 과학의 중심, 카이스트 캠퍼스에 마련된 최신식 건물에 유망한 벤처기업들이 모여 서로의 인맥과 지식을 공유하고 정부로부터 여러 가지 혜택과 지원을 받고 있었다. 내가 꿈꾸던 그런 업무 환경이었다. 부러움에 휩싸여 미팅을 하기로 한 회의실로 안내가 되었다. 노브레이크에는 젊은 임원이 3명이 있었는데, 그중에 한 명과 미팅을 하였고, 앞으로 펼칠 내 사업 아이디어와 CrazyWWWBoard가 필요함에 대해서 설명을 하였다. 곧 새로운 버전이 출시가 되는데 그걸 채택하게 되면 내가 최초의 상용 이용자가 된다. 이미 머릿속에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기에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그날 100DB, 즉 100개의 게시판을 구매하기로 계약을 했다. 구매금액은 무려 3백만 원. 거기에 서버호스팅 요금은 별도다. 현재 내 총자본금이 5백만 원임을 감안하면 꽤나 큰 투자가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탄생한 나의 첫 인터넷 웹 서비스, '국민게시판 eMemo'. 100개의 게시판을 주제별로 나누고 그룹화하여 회원가입도 필요 없이 누구나 쉽게 글을 올릴 수 있게 하였다. 그 당시로서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소통의 장을 만든 것이다. 몇몇 아쉬운 점이 있었지만 앞으로 국민게시판을 잘 가꾸고 키우면 추후 커다란 커뮤니티 사이트가 되리라 기대하였다. 중요한 건 수익성이다. 수익이 있어야 서비스를 유지 및 발전시킬 수 있다. 당시에는 보통 유저수를 늘려서 배너나 텍스트 광고 수익을 창출하는 분위기였기에 나 또한 그 방향으로 기획을 하였다. 사이트도 만들어졌고, 이제 유저들을 끌어 모아야 하는데 유료 광고를 하자니 돈은 없고.. 어떻게 할 것인가. 고민 끝에 기자를 하고 있는 선배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돈도 들지 않을 뿐 아니라 엄청난 입소문 효과를 볼 수 있는 것이 신문 기사다. 1999년도 말에는 인터넷 시대가 성큼 다가온 분위기라 괜찮은 서비스가 있으면 신문에 기사가 잘 올라오는 분위기였다. 기자 선배는 흔쾌히 도와주기로 하였고, 보도자료가 될만한 내용을 정리하여 이메일로 보냈다. 며칠 후 정말 신문에 게재가 되었다. 그것도 여러 신문에. 아래가 그 기사 링크다.
한국경제신문 : https://www.hankyung.com/news/article/1999092701821
매일경제신문 : https://www.mk.co.kr/news/home/view/1999/10/85040/
현대미포조선에서 근무하다가 우연히 만나게 된 인터넷 게시판. 그 게시판을 이용해 웹 서비스를 해 보고 싶어서 대기업을 박차고 나왔고, 대전에서 개인사업자를 개설하여 그걸로 CO.KR 도메인을 등록하고, 전문업체를 찾아 서비스를 만들고 홍보하는 과정까지.. 비록 아직 수익은 전혀 없지만 줄곧 생각해온 꿈의 실현을 위해 매일 뭔가를 추진해 나간다는 것이 너무 행복하고 뿌듯했다. 기사 날짜를 보니 1999년 9월 말쯤이다. 첫째 생일이 9월 12일이니 아기가 태어난 이후다. 돈 들어갈 일이 꽤 많았을 텐데 3개월 동안 수입도 없이 어떻게 지냈나 모르겠다. 또 앞으로도 바로 수입이 생기지도 않는다. 언제 유저를 늘려서 광고 수익이 들어오기를 기다린단 말인가. 23년이 지난 지금, 그때를 생각하면 참 답답하고 철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이 반짝거리면서 열의에 가득 찬 그 용기 하나만큼은 젊으니까 보기 좋았다고 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