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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옥이와 일이 Mar 30. 2024

규슈 올레

< 구루메 · 고라산 코스 >

8. 구루메 · 고라산 코스 (久留米・高良山コース)  

*. 코스 : JR구루메대학역 --> 부부신과 사랑의 아기동백꽃 (1.5km) --> 맹종금명죽림(2.1km) --> 오쿠미야--> 구루메 삼림 철쭉 공원 (5.2km) --> 고리타이샤 (6.4km) --> 묘켄신사 (7.0km) --> JR미이역(8.6km)


  규슈 톈진 야나기바시에 있는 호텔 <크로스라이프>는 체인으로 연결되어 있는데, 도심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탓인지 가성비가 훌륭하다. 12층인 숙소의 창문을 여니 온통 잿빛으로 흐려있다. 새벽바람을 맞으며 출근하는 사람들의 행렬이 폭포수의 거친 물처럼 빠르고 부산하게 이동한다. 여행객인 우리는 아침 스트레칭으로 잠에서 덜 깬 몸을 열고 다시 짐을 싼다. 

하룻밤 익숙했던 공간을 떠나기 위한 짐 싸기는 묘한 설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낯선 곳으로 가야 한다는 두려움 때문에 마음을 다소 복잡하게 하기도 한다. 

여행의 날이 길어질수록 짐을 싸고 푸는 것이 점점 익숙해져 시간이 단축되고 출발 시간이 빨라진다. 

 


 오늘 우리가 도전할 곳은 구루메-고라산 코스로 후쿠오카에서 JR 열차로 불과 30분이면 도착할 수 있는 구루메시에 있다. 

무리 없이 기차를 타고 이른 시간 구루메 역에 도착한다. 인구 50만 명이 사는 구루메시는 잘 발달된 공업도시이다. 

도착하니 비가 부슬부슬 내린다.  먼저 숙소로 가 짐을 맡기고 출발지인 구루메 대학 역으로 발길을 옮긴다. 




아침을 거르고 출발했으니 허기가 느껴진다. 마침 일본 가정식을 파는 작고 아담한 카페를 발견하여 들어가니 깔끔하고 따뜻하다. 옛날 팝송이 은은하게 흐르고, 친절한 미소의 아주머니가 소리 없이 분주하게 음식을 만들어 낸다. 

전식으로 단호박 묽은 수프에 가정식 반찬 3개(우엉당근 볶음, 다시마와 메주콩과 곤약과 짠 두부 볶음, 콩조림)가 앙증맞은 접시에 담겨 나오는데 자극적이지 않고 맛있다. 

본식으로 나온 함박스테이크와 올드 팝송이 80년대 초반 대학생 시절을 소환한다. 지금이야 핫 플레이스가 여러 곳이지만 그 시절 종로 2가는 젊음의 거리였다. 양지다방, 반줄 경양식집, YMCA 지하다방, 종로서적은 늘 대학생들로 북적였다. 더구나 서울도 아닌 위성 소도시에 살았던 나에게 종로 거리는 꿈꾸던 대학 생활을 제대로 누리게 해주는 드림스트리트였다고나 할까?

새내기 대학생이 종로서적 뒤편 반줄 경양식집에서 처음 먹어본 함박스테이크는 가히 신세계의 경험이었다. 갑자기 낯선 나라에서 40년도 더 지난 추억을 끄집어내다니 참 신기한 일이다. 

      

구루메·고라산 코스는 고우라 대신사(高良大社)를 중심으로 고라산(高良山)을 한 바퀴 도는 여정이다.

처음부터 간세와 리본을 잘 찾지 못하고 약간 우왕좌왕하다가 숲길을 찾아들어선다. 입구부터 습하고 서늘한 냉기가 몸속으로 스민다. 어둑한 숲의 기운에 신비로움마저 감돈다. 조금 걸어 올라가니 그윽한 숲 향기가 퍼지며 이내 몸이 더워진다. 이 산은 고라산(高良山)이다. 구루메(久留米) 시의 북한산 같은 산이다.

 조금 오르니 두 그루의 나무가 가지로 연결되어 손을 잡은 부부처럼 보이는 부부신나무가 나온다.  양쪽으로 갈라진 줄기가 도중에 연결되어, 헤어졌어도 결국은 원래로 돌아오는 사랑의 힘을 준다는 애기 동백꽃나무도 우리를 반갑게 맞아 준다. 유독 규슈 올레에서 자주 다퉜던지라 우리 부부도 나무들이 주는 화해의 기운을 듬뿍 받았으면 하는 마음이다. 

      

고라산에는 1600년도 더 된 신사가 있다. 파란색 표시의 리본과 신비스러운 산의 정기와 오래된 신사의 자력에 이끌려 걸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고우라 대신사로 들어간다. 고우라 대신사는 액막이와 고령 장수로 유명한 신사로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높은 산정 아래에 위치하여 아래의 치쿠고(筑後) 평야가 한눈에 보이는 전망도 좋은 곳이다. 신년맞이로 들뜬 사람들 틈에 끼여 우리 부부도 촛불을 밝히며 신년운을 빌어본다. 

그러나 정성이 부족했던 탓일까? 올레 표시를 찾아 다음 코스로 가려는데 간세 밑의 남은 숫자가 2.7KM라 쓰여 있다. 한 시간여 지났을 뿐인데 벌써 종착지라니 우리는 또 길을 잃은 것이다. 

다시 출발지점을 향해 빨간 표시를 보고 돌아가 보았다. 그래도 찾으려 하는 다음 지점이 찾아지지 않는다. 우리는 이 자력에서 벗어나려고 계속 지도를 연구하며 신사를 빠져나와 놓진 곳을 찾아 걷는데 계속 같은 곳을 맴돌고 있다. 환상방황(環狀彷徨, RING BANDERUNG)이 일어난 것이다. 

결국 우리의 잘못을 발견했다. 구조지점 번호를 지도에 나온 포인트의 번호와 혼동한 사실을 간과했던 것이다. 세상에! 둘 다 얼이 빠졌던 것이다.       


한바탕 소동 끝에 긴장도 풀리고 편안한 마음으로 단풍나무잎들이 낙엽이 되어 푹신해진 길을 걷는다. 

단풍나무와 철쭉나무들을 계획적으로 조림해 놓아 겨울인데도 보기가 좋다.

계획적 조림에는 독지가들의 후원이 있어 가능했다고 한다. 

우리가 자연을 통해서 얻은 부를 다시 원래 자리로 되돌려 두려는 마음은 자연에 대한 겸손에서 나온 것이리라.

하나라도 더 움켜쥐려고 욕심을 부리는 사람들이 많은 세상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자세이다.

꽃피는 봄이나 단풍 든 가을의 고라산은 환상적일 것이란 상상을 하며 삼나무가 울창한 좁은 숲길을 걷다가 오쿠노미야(오쿠노인) 신사(奥宮(奥の院)) 를 만난다. 겨울철 오후 아무도 없는 신사에는 신령한 신들의 기운이 뿜어져 나오는지 왠지 으스스한 기분이 든다. 호기심 많은 남편도 구경을 포기하고 얼른 가자고 손을 내민다. 

곧이어 그렇게도 보고 싶었던 구루메 철쭉공원이 나온다. 

구루메 철쭉 약 100종 61,000그루가 심어져 있다는 철쭉 공원은 그 규모며 디테일면에서 잘 가꾸어진 모습이다. 안내지에는 <구루메 철쭉>이라고 이름을 붙여 놨는데 어떻게 다른지 볼 수가 없으니 아쉽다. 여행에서 날씨는 그 질을 현저히 좌우한다는 것을 또 한 번 뼈저리게 느끼며 꽃핀 구루메 철쭉을 상상해 본다. 


공원을 지나니 또다시 고우라 대신사이다. 이곳 구루메·고라산 코스는 시종일관 고우라 대신사를 중심으로 빙 둘러 걷게 한다. 

길을 잘못 들어 일찍 본 탓에 건너뛰고 아래로 내려오니 이끼가 잔뜩 낀 나무들 사이로 아주 작은 묘우켄 신사(妙見神社)의 표지판이 보인다. 학업 성적이나 시험합격의 영험이 있는 곳이라고 쓰여 있다. 시간이 저물어 어둑해지고 있다고 채근하는 남편의 말을 못 들은 체하고 신사로 들어가 둘째 사위의 취업시험 합격을 기원한다. 



잠시 지체되었던 발걸음을 빠르게 하니 이내 산의 입구가 나오고 거기에 한글로 "규슈 올레에 잘 오셨습니다."란 문구가 반긴다. 


그러나 아직도 끝이 아니다. 널찍한 돌판으로 되어 있는 오솔길을 따라 내려오니 벚나무들이 빼곡히 둘러 서 있는 왕자 연못이 보인다. 봄이면 벚꽃으로, 또 가을이면 벌처럼 세차게 뿜어내는 불꽃놀이로 이름이 나 있는 곳이다. 연못 바로 옆에 400 계단이 있어 오르니 구루메 시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비로소 한숨 돌려본다. 

    

‘무사태평해 보이는 사람들도 마음 밑바닥을 두드려 보면 어쩐지 슬픈 소리가 난다’라고 했던 시크한 콧수염의 사나이 <나스메 소세끼>의 무덤을 만난다. 마을의 작은 공원에 있어 하마터면 지나칠 뻔했다. 근사하게 치장을 하고 기념관 같은 것도 세웠을 것을 소소한 모습에 자못 숙연해진다.

일본 근대문학의 아버지이며 일본의 셰익스피어라 불렸던, 그러나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고 신경쇠약으로 49세에 생을 마감한 천재와의 만남을 마지막으로 8번째 올레를 마무리한다.     


오늘만큼은 길이 순조로울 것을 기대했으나 시작부터 산의 기운에 압도되었는지 또 길을 잃고 말았다. 물론 길을 잃어서 새롭게 깨달은 것도 있었다. 아직도 겸손이 부족하다는 것, 그리고 같이 길을 갈 때 서로 같은 마음이어야 한다는 것…. 덕분에 원래의 거리보다 훨씬 더 많은 거리를 걸었으므로 충분한 운동은 되었다고 위로해 본다. 


 이 코스는 고라산이라는 제법 큰 산길을 구석구석 걷는 코스이다. 구르메 시내 일대가 다 내려다보이는 전망대가 곳곳에 있고 무엇보다 오래되고 규모가 큰 고우라 신사가 있고 작지만 오래된 신사들이 곳곳에 있다. 등산로와 산책로가 잘 어우러져 있어 평소에도 산을 오르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았다. 결국, 오랜 시간 잘 즐겼지만 어둑해져서야 마을로 내려오게 되었다.


 중고등학교생들이 자전거 헤드라이트를 켜고 귀가를 한다. 삼삼오오 장난을 치며 집으로 돌아가는 아이들도 있다. 저녁 무렵 펼쳐지는 귀갓길의 정겨운 풍경은 어디에서나 다르지 않다. 문득 우리도 숙소로 귀가를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며 역에 도착한다. 구루메로 가는 미이역 역사에 켜진 푸른 등이 어둠 속에서 지친 우리를 반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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