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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옥이와 일이 Jun 02. 2024

규슈 올레

< 미야마 · 기요미즈야마 코스 >

9. 미야마 · 기요미즈야마 코스(みやま・清水山コース)

*. 하치라쿠카이  → 우부메다니수문(0.6km) → 야마우치고분군 (1.3 km) → 조야마사적삼림공원 (1.6 km) → 조야마고고이시 (1.7 km) → 구로이와저수지(2.6 km) → 메가네바시다리 (4.1 km) → 혼보정원 (4.7 km) → 오백나한 (5.0km) → 기요미즈데라절 (5.5 km) → 기요미즈데라절 삼중탑 (5.6 km) → 제2전망소(5.8 km) → 오오다니저수지 (6.8 km) → 스와신사 (7.4 km) → 미치노에키 미야마(11.5km)


여행의 매너리즘! 매일 반복되는 현실을 탈피하고 싶어 떠나온 여행이다. 새로움에 흥분되고 낯설어하며 모든 것이 호기심 천국이던 마음이 어느새 자취를 감춰 버리고 익숙한 공간의 일상이 되어 버렸다. 

34년 다니던 직장을 관두고 떠날 만큼 오랜 소망이던 산티아고 순례길에서도 열흘쯤 지나니 감흥이 떨어지며 나타났던 현상이었는데, 이곳 규슈 올레에서도 어김없이 또 병처럼 도진다. 

더 이상 흥미로운 것도 없고 새롭지도 않고 매일 짐을 쌌다 풀었다 하는 것도 귀찮아지면서 그저 익숙한 공간으로 되돌아가 편안해지고 싶은 마음만이 간절한 아침이다.

사람은 마음이 간사한 요물이라더니, 그토록 간절했을 여행이 시들해지고 있다.


하기 싫은 숙제를 끝내야 하듯 오늘의 목표인 미야마 · 기요미즈야마 코스(みやま・清水山コース)를 해내기 위해 숙소를 나온다. 숙소에서 20여 분 떨어진 구루메코코마에 역에서 구루메역으로 신칸센을 타고 가 지역 열차로 갈아타 세타카역으로 간다. 역시나 찾아가는 길이 만만치 않다. 

출근과 등교로 분주한 도시의 인파 속에서 배낭 메고 여유를 부리는 여행자인 우리는 이방인처럼 생뚱맞아 보이고 미안한 마음마저 든다. 


‘일상의 삶은 공간에 갇힌 시간이고, 여행은 열린 공간으로 이어지는 시간을 사는 것’이라는 구절을 읽었던 기억이 있다. 


현지인들에게는 빠르게 지나가는 시간이겠지만 여행자에게는 하루가 1년처럼 느리게 흐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지루하다. 아이러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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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타카역에서 여산으로 이동하기 위한 버스 >

미야마 · 기요미즈야마 코스로 가기 위해 버스로 갈아타야 하는 세타카역은 아주 작은 시골 역이다. 이곳에서 커뮤니티 버스를 타야 하는데 정확한 안내가 없다.

결국 역무원에게 도움을 청해 1시간여 기다려 5호차라 되어 있는 작고 아담한 셔틀버스를 탄다. 논밭 길과 마을의 사잇길을 돌고 돌아 20분 정도 걸려 도착한 곳은 여산이라는 곳이다. 하치라쿠카이(八楽会)교단이 있는 공터가 오늘의 올레 시작점이다. 우리나라보다 50년을 앞서간다는 일본인데 규슈의 시골은 성장이 멈춘 듯 모든 것이 슬로우다. 

시작점인 히치라쿠카이 절은 넓은 평야 한가운데에 있어 사방을 시원하게 조망할 수 있다. 아버지가 신내림을 받아 세웠다는 신흥 교단의 경내는 깔끔하고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어 가로지르기에 미안한 마음이 든다.

< 히치라쿠카이 절 - 시작점 >

 공터에 대나무 지팡이가 있는 걸로 보아 마을을 감싸고 있는 조야마 삼림공원(女山森林公園)의 산세가 가파른가 보다. 


마을을 돌아 이내 조야마 사적 삼림공원 입구(女山森林公園)로 들어서니 온통 키 큰 대나무 숲이다. 평평하고 좁은 산길은 급경사로 이어지며 어른들 몸통만 한 나무들이 하늘까지 키를 키우며 치솟아 있다. 아름드리 아래 동이가 땅에 두툼하게 자리를 잡고 굳건하게 서 있으나 하늘을 가린 꼭대기 부분은 가늘고 여려 바람이 불 때마다 이리저리 휘리릭 몸을 보챈다. 하늘을 올려다보면 어릴 적 읽었던 <잭과 콩나무>가 연상된다. ‘신이 머무는 대나무 숲’이라 불릴 정도로 대나무 숲 사이로 언뜻언뜻 비치는 햇살이 땅으로 닿을 때는 신비스럽다 못해 경이롭기까지 하다.     

숨이 턱에 차오를 때쯤 조야마 사적 삼림공원 전망대에 오른다. 이곳에서는 지쿠코 평야와 아리아케 해를 조망할 수 있는 곳이다. 


전망대에서 3km 정도 내려오는 길에는 이끼가 잔뜩 낀 자갈과 암석들이 유난히 많아 걷기에 조심스럽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곳의 돌들은 조야마고고이시(女山神籠石)로 선사시대에 쌓았던 산성의 흔적들이었는데 우리는 그저 예사로운 돌인 줄로만 알았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새삼 길에 대해 겸손하지 못했음을 돌아본다.      

잔뜩 긴장하며 내려오니 엄선한 소바 가루만을 사용한다는 수타 소바집이 보인다. 안내지에 ‘예약 필수’인 집으로 소개되어 무계획으로 다니는 우리는 밑져야 본전이라는 마음으로 문을 두드린다. 마침 오픈 준비를 막 끝낸 듯한 젊은 주인 네가 친절하게도 들어오라 한다.

‘앗싸!’ 오늘은 출발이 좋다. 

전통 일본식 가옥으로 실내는 엣지스런 고가구와 생활 도자기로 단아하고 깔끔하게 인테리어가 되어 있다. 현대와 전통의 조화를 엿볼 수 있는 복도와 거실 그리고 반쯤 분리된 방들이 은은한 조명을 받아 우아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밖으로 내다보이는 일본식 정원은 정원석과 아열대의 식물들이 연못과 어우러지고, 때마침 내리는 보슬비까지 더해져 그 품격을 더한다. 

손으로 직접 반죽한 메밀 소바는 약간 거친 특유의 메밀 맛이 살아있고, 모둠튀김(우엉, 단호박, 양송이버섯, 느타리버섯, 새우, 쌉싸름한 야채, 가지)은 얇은 튀김옷이 바삭거리며 담백하고 고소하다. 신비감이 떨어진 여행의 동력에 국수 한 그릇이 마중물이 되어 발동을 제대로 걸어준다.

‘그래, 이 맛있는 음식만으로도 만족이다!’

조금 더 머무르고 싶었지만 해가 떨어지기 전에 여정을 마무리하려면 일어서야 한다.     

겨울이라 한산하다 못해 마주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는 마을을 돌아 다시 산으로 오른다. 

계곡 초입에서 아치형 석조다리인 메가네바시다리(眼鏡橋)를 만난다. 건물은 낡았고 그 앞에 있는 초록색 이끼와 거무칙칙한 곰팡이가 핀 돌다리는 뭔가 의미가 있을 것 같은 모습으로 해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그냥 지나치고 싶은 나의 마음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빠른 걸음으로 남편은 어느새 다리 위에 서 있다. 현재 위치가 아닌 멀리 떨어져 있던 것을 도로 확장으로 이전한 것이다. 마을에 콘크리트로 튼튼한 교량이 세워져 쓸모가 없어진 다리를 철거하려 했으나, 마을 사람 전원의 땀과 노력으로 세운 다리이기 때문에 주민이 하나가 되어 지켜내어 모습을 보존하고 있다고 한다.      


석가의 제자 오백나한(五百羅漢)을 조각한 석상이 산을 배경으로 쭉 놓여 있는 풍경은 꽤 장관이다. 멈춰 들여다보니 크고 작고 뚱뚱하고 날씬한 형상이며 그 표정 하나하나가 서로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설마, 같은 모습을 한 석상이 한 개라도 있겠지….’ 눈을 부릅뜨고 한참을 찾으나 헛수고였다. 오백나한에 얽힌 재미난 이야기가 있다. 어느 날 누군가에 의해 나한들의 목이 모두 잘려 나갔는데, 신기하게도 어느 날 누군가에 의해 다시 목이 붙여져 있었다고 한다. 기도의 효험이 나타날지도 모르겠으나 목이 잘려 나갔을 때의 모습을 떠올리니 왠지 스산한 기분이 들어 발걸음을 재촉한다.   

   

< 오백나한 >

오늘의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기요미즈데라절(清水寺)의 일주문이 깊은 산중에 있음에도 그 규모며 건축이 대단하다. 순산과 인연· 임신에 영험한 곳이라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으로 늦은 시간인데도 기도하는 사람들이 제법 눈에 띈다. 특히 본전 옆 누각에 있는 나데보토게(なで仏) 불상은 몸이 아픈 부분이 있을 때 똑같은 부분을 만지고 자기 몸을 만지면 아픔이 없어진다고 알려져 있다. 아픈 동생이 생각나 한참이나 불상을 만지며 쾌유를 빈다. 

< 기요미즈데라의 일주문과 나데보토게(なで仏) 불상 >

기요미즈데라에서 백미라 한다면 삼중탑(清水寺三重塔)이다. 1836년 오사카의 사텐노지(四天王寺)를 본떠 14년에 걸쳐 지어졌다 한다. 날렵하고 고고한 기와지붕과 붉은색 기둥과 흰색 벽이 자연경관과 어우러져 멋진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양쪽 마당에 오래된 벚꽃 나무에 만개할 꽃들과 어우러질 모습을 상상해 본다. 삼중탑 한쪽 편에는 모유 수유에 문제가 있는 여성들을 도와준다는 지치부관음이 모셔져 있다.      


죽림으로 무성한 산길은 저 멀리 운젠과 아리아케 해가 보이는 전망대, 오오다니저수지(大谷溜池), 작은 신사로 이어진다. 너른 평야에서 자라고 있는 푸릇푸릇한 밀 싹 위로 비가 내린다. 


농산물과 특산물을 구매할 수 있는 미야마 · 기요미즈야마 코스의 종착점인 미치노에키 미야마로 내려오는 길은 오르는 길만큼 녹록지 않다. 

아침부터 들었던 복잡한 생각들이 엉켜 내려오는 길 내내 머릿속이 어지럽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산과 길을 정비하는지 포크레인으로 파놓은 길에 눈이 녹아 진창이다. 왠지 오늘은 규슈 올레의 매너리즘이 시작부터 지금까지 계속되는 듯싶다. 신발에 덕지덕지 달라붙는 진흙도 내 마음처럼 빨리 떼어내고 싶은 심정이다.


뛰다시피 산에서 내려오니 겨울철 비워둔 빈집의 돌담 사이로 수줍은 듯 어린 풀이 고개를 내밀고 있다. 

갑자기 ‘그 추웠던 겨울을 이겨내느라 얼마나 애썼을까?’라는 짠한 생각으로 울컥한다. 그러고 보니 빈집 앞다리 밑에서도 시냇물이 졸졸거리며 부지런히 봄단장을 하고 있다. 자세히 들여다보아야 알 수 있는 것인데 나는 오늘 건성으로 걸으며 툴툴거리기만 한 것이다. 


우리가 사는 인생도 그럴 것이다. 좋은 날이 있으면 궂은날도 있고 그런 날이 생각보다 길어질 때도 있다. 좌절되어 포기하고 싶어질 때 생각지 못한 반전으로 다시 힘을 얻는 순간이 있는 것이다. 산을 다 내려와 모퉁이를 돌다 만난 빈집에서 뜻밖에 삶의 지혜를 발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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