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저녁부터 아침까지 비가 추적추적 내린다. 먼 길을 걷는 이에게 이렇게 내리는 비는 낭만보다는 거추장스러운 불청객일 때가 많다. 무거운 배낭을 메고 우산까지 쓰니 시작부터 고되다. 많은 비가 아니어서 우의까지는 입지 않아 그나마 다행이다.
오늘의 시작인 야메코스(八女コース)를 가기 위해 니시테츠 구루메역으로 간다. 거미줄처럼 철도가 발달된 일본의 니시테츠 선은 서일본 철도의 본선 격이라고 할 수 있는 노선이다. 니시테츠 선은 후쿠오카현의 남북 대동맥 역할을 하고 있으며 여행객들에게는 물론 통학과 통근에도 중요한 노선으로 이용객들로 매우 붐비고 복잡하다.
서두른 덕분에 니시테츠 구루메역에서 8시 58분 출발인 31번 버스를 탈 수 있었다. 환승역인 후쿠시마 코코마에 도착했다. 여기서 다시 호리카와 버스를 갈아타고 우에야마우치 정류장으로 가야 한다. 그런데 안내표시가 한자가 아니라 일본어로만 되어 있고 어디에서 버스를 타야 하는지 난감하다. 결국, 구글 앱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는데, 설상가상으로 갈 곳을 검색하니 전혀 다른 곳이 나온다. 순간 당황스러웠으나, 친구들 다섯 명으로 구성된 일본인 아저씨들이 길을 건너 환승 터미널로 오길래 눈치껏 길을 물어 버스 타는 곳을 확인하고 버스표도 구입한다.
한숨 돌리고 버스를 기다리는데 남편의 표정이 별로 좋아 보이지 않는다.
아차! 이리저리 궁리하고 있던 남편은 안중에도 없이 급한 마음에 또 먼저 나선 것이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는 부분에서 때때로 남편과 날 선 신경전을 벌이게 된다.
남편은 어떡하든 본인이 끙끙대며 문제를 해결해 보려곤 한다. 그러나 나는 봉착할지도 모를 난관을 미리 예단하여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하고 문제를 가능하면 빨리 해결하려고 한다. 이렇게 우리는 서로 달라도 너무 다르다. 35년을 부부로 살아왔음에도 좁히지 못하는 다름이다. 쉽게 바뀌지 않는 것이 몸에 밴 습관이다. 돌이켜보면 내가 미리 염려하는 난관이라야 길을 좀 헤매고 여정이 늦추어질 수 있는 정도이다. 그리 큰 문제도 아니라 한발 물러설 수도 있을 텐데, 급한 성격 탓에 기다려주지 못하여 남편의 빈정을 종종 상하게 한다.
버스의 앞자리에 자리를 잡고 앉았는데 뒤따라 탄 남편은 저 뒤로 멀찌감치 떨어져 자리를 잡는다.
그렇게 먼 나라 이웃 나라처럼 뚝 떨어져 오늘의 시작점인 야메 야마우치점 미니스톱 앞에 도착한다.
여전히 가랑비가 내린다. 길은 검은 기와와 나무로 벽을 만들어 지은 전통 일본식 가옥들이 정갈하게 들어서 있는 마을로 이어진다. 아침나절 깨끗하게 쓸어놓은 골목길과 양쪽 담장 사이로 봉긋하게 솟아오른 화단의 여린 새순들이 봄의 기운을 느끼게 한다.
마을을 벗어나자 마을 뒷산으로 오르는 길이 나온다. 날이 개면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우리는 첫 번째 포인트인 야마노이 공원(山の井公園スタート)에서 브런치를 먹으며 오늘 하루를 워밍업 한다. 야마노이 공원은 맑은 호시노강이 바라다보이고 잘 다듬어진 나무들로 에워싸인 아담한 공원이다. 상류 쪽 봇둑 건설을 할 때 인주(人柱, 히토바시라:인신 공양의 일종)의 제물이 된 나카시마 우치노스케의 위업을 기리는 기념비가 있다고 한다. 상상만 해도 오싹한 기분이 든다.
오늘 우리가 걷는 야메 코스는 일본의 여성으로 처음 에베레스트를 등정한 ‘티베이 준코’가 특별히 추천하는 길이라 하여 유명세가 있는 길이다.
공원의 나무 계단을 오르니 도난잔 고분(童男山古墳)이 나온다. 야메 지역에는 약 300기의 고분이 있다. 이는 500년대(소분시대)에 북부 규슈 일대를 차지했던 ‘츠쿠시노키미 이와이’가 야메 지역에서 그 세력을 넓혔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중 가장 나중에 만들어진 도난잔 고분의 부장품은 도착점인 ‘이와토산 역사문화교류관’에 보관되어 있고, 석실에는 석관이 놓였던 자리와 군데군데 무너져 내린 봉분만 남아 있다. 특이한 점은 부적으로 철단을 칠해서 벽색이 붉은 것이다. 천정에서 빛이 들어오며 그 사이로 빗방울이 떨어진다. 위세 하던 무덤의 주인은 흔적도 없건만 수천 년 세월을 거쳐 오며 변치 않는 것은 저 햇살뿐이리라.
유명인의 추천코스라서 그런지 야메 코스는 이제까지 걸었던 다른 지역하고 느낌이 달랐다.
길마다 안내표시와 친절한 설명, 그리고 완만한 구릉길을 오르락내리락할 때마다 광활하게 펼쳐진 초록의 풍경이 지치지 않고 걸을 수 있게 한다.
고분을 뒤로 두고 언덕을 오르니 잘 닦여진 산책길이 펼쳐진다. 폭신한 낙엽이 양탄자처럼 깔리고, 대왕송이라 불리는 소나무의 솔방울이 발밑에서 ‘바스락’ 소리를 내며 부서진다. 리듬에 맞춰 경쾌하게 발걸음을 내디디니 덩달아 기분이 좋아진다.
카마쿠라 시대 초기에 세워졌다고 하는 산성의 터(犬尾城跡)를 지나, 길은 너른 차밭 사이로 굽이굽이 이어진다. 여리디 여린 찻잎이 손에 닿아 부서질 것 같아 조심조심 걷는다. 이내 그 유명한 ‘야메 중앙 대단원 전망소(八女中央大茶園)’가 나온다.이곳에서 65ha라 되는 넓은 초록의 차밭과 그 가운데 죽 늘어선 흰색의 바람개비가 ‘휘리릭’돌아가는 형언할 수 없는 장관과 마주한다. 우리는 차 밭 가운데로 이어진 길 위에 두 개의 작은 점이 되어 바람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싱그러운 차향에 한껏 취한다.
이곳에서 생산되는 야메 교쿠로차는 햇차의 새싹이 올라올 무렵 차광 재배를 해 찻잎의 떫은맛을 줄이고 감칠맛을 늘려 최고의 고급 차로 꼽힌다고 한다. 야메 중앙 차 협동조합에서 신선한 차라도 구매할 요량으로 부지런히 내려왔는데 굳게 문이 닫혀 있다. 겨울이어서 차 판매점이나 식당의 문이 대부분 닫혀 있는가 보다.
녹차 밭을 지나 마을로 내려오니 그 유명한 ‘라무네’라 하는 사이다를 파는 상점(江﨑食品)이 보인다. 별 기대를 하지 않고 미닫이를 미니 문이 열린다. 다리품도 쉴 겸 병으로 된 사이다 1병을 사서 나누어 마신다. 병 주둥이에 구슬이 있어 마실 때마다 덜거덕 소리를 내며 조금씩 쏟아진다.
옛날 길 가는 나그네가 동네 어귀의 우물에서 물을 청하면 일부러 버들잎 한두 잎을 띄웠다는 아낙네의 이야기가 떠오르는 풍경이다.
저녁의 뉘엿한 햇살이 유리 미닫이문으로 찾아드는 이 작고 소박한 식품점을 나오는데 주인아주머니가 밥풀 튀밥을 한 봉지 건네며 정다운 작별 인사를 한다. 평안한 길만큼이나 아주머니의 넉넉한 미소와 함께 받은 튀밥 선물은 잊지 못할 추억의 하나로 남을 것이다.
큰길을 건너 야트막한 구릉 위로 큰 대형 고분이 보인다. 마루야마즈카고분(丸山塚古墳)이다. 이 고분은 6세기 후반에 축조된 것으로 채색 장식을 보유하고 있는 국가지정 사적 원분이라고 한다. 주변에 벚나무가 심겨 있고 벤치가 있어 사람들이 많이 눈에 띈다. 이곳에서 노을이 조용히 내려앉는 야메 시가지의 평화로운 저녁 풍경을 내려다본다. 곧이어 노을이 지고 정면에 보이는 토비카타야마(산)에 어둠이 깃드는 모습을 보며 부지런히 걸음을 옮긴다.
거의 도착점인가 싶은 지점에 다시 규슈의 최대 규모인 이와토산 고분을 지나며 마지막 지점에서 ‘이와토산 역사문화교류관’을 만난다. 종일 본 고분에서 출토된 유물들을 관람하며 오늘의 일정을 마무리한다.
야메코스는 아주 먼 고대 역사 속으로 깊숙이 빠져들다가 다시 한없이 펼쳐지는 녹차 밭으로 이어지는 신비한 영감을 주는 편안하고 경치도 좋고 걷기도 좋은 길이다.
< 이와토산 역사문화교류관 내부 >
긴 여행을 하다 보면 힘들고 포기하고 싶은 고비가 찾아올 때가 있었다. 어제가 그랬다. 그런데 오늘 그 위기를 시원하게 날려 보낼 수 있었다. 야메 코스가 주는 신비한 치유의 힘 덕분이 아닌가 싶다. 내일 다시 기운을 내어 규슈 올레의 다음 길을 이어서 걸을 수 있을 것 같다.